미스 함무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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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드라마였다. 전문 드라마 작가의 작품이 아니여서였을까, 뒤로 갈수록 서사의 힘이 약해진 것은 분명 아쉬운 부분이었지만, ‘생활밀착형 법정드라마’라는 선전에 걸맞게 기존 법정드라마에서 볼 수 없었던 신선한 주제들을 다뤄낸 것 또한 분명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였기에, 경험해 볼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간접경험의 측면에선 분명 기억에 남을 작품이다.

재벌2세의 만행이 드러나고 계란이 투척되는 장면은 너무 통속적이었다. 해피엔딩에 대한 강박처럼 느껴졌다고나 할까.. 재판부 나름의 소신있는 판결이 배심원들의 만장일치로 이어지는 장면 또한 지나치게 극적일뻔 했지만 ‘위로 올라가면 판결은 뒤집힐 확률이 높다’는 함부장의 말로 어느정도의 현실감각을 찾게 된다.

이렇게 궁시렁대다가 질문이 생겼다. 왜 해피엔딩은 안되는걸까. 원칙적으로 해피엔딩을 싫어할 사람은 보통 성격파탄자가 아닌 이상 없을거다. (그게 자기 일이라면 더욱.) 그럼에도 우리가 해피엔딩을 불편해 하는 건 아마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기에, 모두가 행복하고 정의가 승리하는 결말을 보며 즐거워하는 자기 모습을 보는 게 꼭 순진한 바보가 되는 기분이라서 애써 저항하는 게 아닐까. 기대하면 실망할까봐 생긴 일종의 방어기제.

더 깊이 생각하자면 드라마 같은 영상물의 역할이 무엇일까 라는 답 없는 질문까지 해야겠지만, 어쨌든 난 현실의 후짐을 그대로 직시하면서도 아직 희망은 있다고 말하는 그런 엔딩을 좋아한다. ‘비밀의 숲’의 엔딩은 그런 의미에서 참 좋았다. (공교롭게도 이 드라마의 후속작이 바로 비밀의 숲 작가의 복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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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의 소심한 반격

6월의 북클럽 책은 David Sax의 ‘아날로그의 반격’이었다. 걷잡을 수 없이 몰입되는 그런 책은 아니었지만 유능한 저널리스트답게 자신이 가진 논지를 다양한 케이스 스터디를 통해 펼쳐 놓은, 깔끔한 책이란 인상을 받았다. 읽은 책을 정리함에 있어 번호나 불렛 포인트로 소감을 나누는건 조금 게으르다는 생각이 든다 (가능하면 개연성 있는 구조를 가진 한편의 글을 쓰도록 해야한다.) 하지만 이 주제에 관련해 선정한 관련도서 몇권을 아직 읽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일단 오늘의 생각을 기록해두는 정도로 해두자.

1.
‘아날로그의 반격’같은 논픽션 책을 읽는 방법에 대해 –
처음 두 챕터 정도를 읽고나면 저자의 서술방식이 어떤지 대략적으로 감을 잡을 수가 있다. 저자는 자신 혹은 누군가의 경험담을 통해 스토리텔링으로 큰 뼈대를 만들고 여기에 취재 내용과 다양한 케이스 스터디들을 버무리는데, 주장+back up evidence 구조에 매우 충실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예시들에 큰 관심이 없다면 스킵하고 책을 봐도 무방하다.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느낌상으론 스킵해도 되는 내용이 70% 가까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대부분의 논픽션 책을 이렇게 읽는다.) ‘사례’들은 결국 ‘정보’에 불과하고 며칠 후면 희미해진다. 즉, 인사이트와 사례를 구분해서 저자의 논지가 무엇인지 흐름을 따라가는데 집중한다.

2.
제목에 대해 –
북클럽을 시작한지 15개월이 지나서 처음으로 한글판 제목이 좋다는 의견이 대다수였던 책이었다. 실재로 책을 읽고나면 아날로그로의 희귀는 세상을 뒤흔드는 메가트렌드라기 보단 디지털로 가득한 세상을 향한 소소한 한방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revenge 같은 거창한 제목보단 (굉장히 cheesy 하다) ‘반격’이라는 단어가 더 와닿았다는 의견.

3.
몇해전부터 내가 천착하고 있던 주제들을 여러개 건드렸다. 따라서 나에게 그닥 새로운 책은 아니었지만 여기저기서 짜집기하듯 정리해둔 이론들이 실재 사례에 의해 뒷받침 되기도 한다는 것을 보니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던 것 같다.

– 사라져가는 경험들: 빌 에반스의 LP 판을 우리집 턴테이블 위해 올리기까지 과정을 대략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구입 전의 기대감 -> LP샵까지 가는 길의 번거로움 -> LP샵의 고즈넉한 분위기 / 알파벳 순서로 정렬된 LP판들을 따라가는 행위 / 그 과정에서 예상외의 LP판을 발견하는 즐거움 / 주인장과의 인터랙션 ->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번거로움과 설레임 -> 경건하게 판을 꺼내서 니들위에 올려 놓는 행위 -> 빈티지한 LP판의 소리를 감상. 애플뮤직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는 (내 취향과 거리가 먼) 큐레이션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결국 ‘원하는 음악을 찾아 듣는다’는 목적에 매우 충실하게 디자인 되어 있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몇번 두드리면 원하는 결과물에 도달할 수 있지만 위 과정에서 중간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경험/감정들은 말끔히 제거되어 있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인화를 기다리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어떤 경험들은 기술의 발전 속에 도태되고 사라진다. 어떤 의미에서 소비자로서 내가 선택한 결과는 아니다. 다만 디지털이 더 빠르고 더 편리하고, 마찰 없이 매끈하고, 무한증식이 가능한 서비스를 향해 달려온 것이고 당연하게도 그 뒤에는 시장의 논리가 있다. 저자가 헨리 포드를 언급하는 것도 같은 맥락. (알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는 대목이다.) 아날로그의 소심한 반격 따윈 가볍게 무시하고 사용자 경험 개선과 더 풍성한 삶이라는 이름하에 기술은 앞으로도 이런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 분명해보인다. 그러므로 내 삶의 영역에서 아날로그로 인해 더 풍성해 질 수 있는 영역이 어디인지는 스스로 판단하고 이 지점에서 의식적인 선택과 노력이 필요하다. 저자의 말처럼 이제 아날로그는 희생과 노력을 수반하는 ‘선택’의 영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 불편/불완전함의 역설: 데이비드 보위의 예시를 보며 난 유재하를 생각했다. 안타까움과 떨림 같은 것들이 음악 자체로 현현한 듯한 날것의 음악. 요즘 같으면 오토튠으로 음정 맞추고 난도질을 당했을 앨범이다. 말하자면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단 걸 전제로 하고 나온 결과물에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이 있기도 하다는 것인데 이부분은 약간 신학적이라는 느낌도.

– 한계의 역설: 무한한 선택지가 주어지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오히려 탈진 상태에 이르게 한다. 나를 둘러싼 울타리가 충분히 넓다면 울타리 안에 갇히는 것이 자유가 될 수 있다는 것. 신앙도 마찬가지다.

4.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
보드게임의 케이스가 시사하는 바는 파트 1의 다른 챕터들과 살짝 궤를 달리 한다. 특히 인상 깊었던 내용은 보드게임의 메카니즘이었는데, 말하자면 참여자들이 게임속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몰입함으로서 함께 그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는 개념이었다. 비디오 게임에서 이 역할은 오롯히 CPU의 것이다. 지난달 북클럽 사람들과 함께 새벽까지 몰두했던 ‘아발론’이 떠오르며 매우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예제였다.

5.
아날로그 하다는 것은 종종 인간답다는 말의 동의어로서, 아날로그가 좋다는 말이 종종 과거에 대한 향수, 감성팔이와 동일시 되는 경향이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좋았던 점은 사람들이 아날로그에 끌리게되는 이유의 배경에 대해 나름의 설명을 제시하여 그러한 경향들로부터 분리시키려 했다는 점인데, 저자는 이것을 직접 만지고 느낄수 있는 감각의 세계로부터의 단절에서 찾으려했다. 그렇다면 아날로그의 어필은 인간 내면의 본질적인 무언가에 기인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 우리가 ‘인간적인 매력이 있다’고 여기는 LP판이나 필름카메라를 1000년전 사람이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그들의 입장에선 필름 카메라의 뷰파인더에 집중하는 인간 또한 마치 포스트휴먼/사이보그 같은 존재처럼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즉, ‘인간답다’의 정의는 유동적이며 시간에 따라 진화중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책을 읽은 이후 나는 저자의 의견에 상당부분 동의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 아날로그의 반격은 창조세계에 대한 일종의 ‘ownership reclaim’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까지이르게 됐다. 최근 다시 읽기 시작한 ‘손으로, 생각하기’의 저자인 매튜 크로포드 또한 아날로그 트렌드를 ‘복잡해진 세계를 이해할 수 없음에 느끼는 불만의 반대급부 현상’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차후 생각을 덧 붙이기로.

4.
책의 논지와는 다소 무관하지만 몰스킨에 관한 챕터를 읽으며 브랜딩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검소한 생활이 미덕이라는 교육을 어려서부터 받아서인지 그동안 브랜드 제품을 고집하는 것에 대해 난 일종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부분에 있어 좀 더 즐길 수 있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브랜드를 통해 투영되는 나의 욕망을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기왕 욕망에 충실하기로 한다면 이왕이면 멋진 브랜드, 멋진 이상과 철학을 추구하는 브랜드를 고르기로 한다. 좋아하는 브랜드의 철학과 스토리텔링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그 커뮤니티에 일부가 되길 원하는 사람은 단순 소비행위를 자기표현의 방식으로 끌어 올릴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분수에 넘치는 과소비는 절대 미덕이 될수 없음을 전제하고 하는 이야기.) 최근 뉴욕 소재 의류 브랜드인 Noah의 팬이 되었는데, 티셔츠 하나를 런칭하는데 이런 장문의 글이 함께 올라온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티셔츠 하나를 입어도 이상/철학을 입는 게 된다. 이왕이면 내가 입는 옷에 부끄럽지 않은 삶도 함께 입을 수 있어야겠다.

요즘 무슨 생각?

인스타그램에 독서에 관한 짧은 단상들을 올리면서 블로그가 뜸해졌다.
사실 순서는 블로그에 글을 먼저 쓰고, 그 축약본이 인스타그램에 올라가는게 옳다.
적어도 진지하게 글을 한번 써보고 싶은 소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해야한다.
조금씩 그렇게 바꿔나가야지 싶다.

내 주변엔 ‘요즘 무슨 생각하며 사니’라고 묻는 분들이 종종 있다. 고마운 일이다.
그러면 나는 처음 잡히는 생각을 덥썩 물어서 이거이거 저거저거 라고 답하긴 하는데,
스스로에게도 썩 만족스러운 답이란 느낌이 안드는 것 같다.
분명 아무 생각 없이 사는건 아닌데, 뚜렷한 방향성이 없어서 그런건가 싶다.

2018년 1/4분기에 집중해야 할 일은 앞으로 몇년간 직장생활을 하며 필요한 일종의
삶의 습관 같은 것들을 구축하는 것이다. 직장생활은 시간을 대하는 완전히 새로운
접근을 요구한다. 말하자면 이때까진 시간이 너무 많아서 문제가 되지 않았던 부분들,
– 예를 들면 여가시간에 대한 개념, ‘쉼’의 정의, 우선순위를 상정하는 일 – 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시간을 대하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방향성과 닿아있다.
방향성이 분명하다면 그 다음은 execution인데 이 부분은 언제나 쉽지 않다.
집중하는 시간을 통한 효율성의 극대화와 utility와는 무관하게 그저 기쁨 안에 거할 수 있는
비효율의 추구가 함께 가야해서 그렇다.

한웅재 라이브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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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그제였나, 꿈에서 한웅재 목사님이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다. (대중가요까지 통틀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이지만 실재로 뵌 적은 한번도 없기 때문에 그분께는 무척 죄송한 얘기지만, 아. 음반구입 관련해서 페이스북 상으로 목사님과 쪽지를 주고 받은 적은 있다.) 꿈이었지만 이젠 이분의 노래를 들을 수 없다는 상실감이 너무나 커서 자다깨다를 여러번 반복했고 현실과 구분이 되질 않아 너무나 허한 마음에 일어나자마자 ‘한웅재’를 구글했다. 물론 당연히 아무일도 없었다 😂 CCM을 하시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가사의 서정성으로 따지면 오늘 신보 낸 루시드폴 뺨대기도 후리실 그 분. (그리고 노래도 더 잘한다.) 대체 왜 이 앨범을 네달이 지나서야 알게 된건가. 정말 주옥 같습니다. 꿈이 있는 자유 때부터 솔로 1-2집까지 좋은 레퍼토리로 가득합니다. 트랙도 무려 17곡…

멋진 신세계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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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시작되는 시점은 A.F (즉 포드년) 632년, 즉 우리 기준으로 25세기로 설정 되어 있는데 헉슬리가 상상한 600년 후의 테크놀로지는 이미 현시점에서 상당부분 코믹할 정도로 낡아보인다. (안테나의 사용이나 초고속 이동수단으로 헬리콥터가 등장하는 등.. 물론 작품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조건유도 등의 인간공학기술은 적어도 아직 실현단계는 아니지만) 이것은 20세기 초반의 헉슬리가 체감한 진보의 속도를 다음 100년간 인류가 아득히 뛰어넘었다는 반증이 될 수 있는데, 책 출간후 15년이지난 1947년에 다시 쓴 머릿글에서 헉슬리가 책에서 예견한 ‘멋진 신세계’를 100년후로 재조정한 것은 흥미롭다.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그 사이에 일어난 굵직한 사건은 2차대전 정도가 생각나는데, 머릿글의 내용으로 짐작해보자면 (“원자력이라는 비인간적인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이 이루는 모든 기존과정들이 붕괴되고 새로운 형태들이 생겨나야하리라” ) 아마 원자력과 핵개발등이 그에게 큰 충격을 줬다는 생각이 든다. 헉슬리와 동시대 인물인 마틴로이드존스 목사의 설교집을 읽어보면 이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핵시대’에 살고 있다는 표현을 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충격적인 신기술의 등장으로 세상이 완전히 변할 것이라는 기대감 그리고 불안함이 공존했던 시대였을 것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 3장에서 버나드/국장/레니나의 대화를 교차편집한 부분은 매우 영화적 연출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챕터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은데, 이외에도 눈에 띄는 작법이 있다면 책 전반에 걸쳐 반어법을 사용한다는 점. 화자는 혼자가 되는 것, 고독, 생각, 질문, 독서, 가족, 역사등 멋진 신세계에서 죄악시되는 가치들을 거의 조롱하다시피 하는데, 이는 역으로 저자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을 드러내고 강조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그려지는 멋진 신세계 속 야만인의 존재를 통해 정상/비정상의 경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환기시키는 방식은 얼마전에 읽은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를 생각나게 한다.

– ‘멋진 신세계’보다 17년 늦게 쓰여진 조지 오웰의 ‘1984’와의 비교는 당연히 불가피하다. 권력의 작동방식에 대한 미쉘 푸코의 말을 빌리자면, 과거 모두에게 보이는 ‘힘을 과시하는’ 공개적 방식으로 작동하던 권력은 고도화 되어가는 사회에서 한계에 직면하자 개인으로 하여금 ‘감시자’를 내면화시키도록 훈육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Big Brother is watching you’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통해 더욱 대중화된 오웰의 ‘감시사회’도 이젠 지나간 메타포처럼 보인다. 이젠 헉슬리의 목소리에 더 힘이 실린다.

– 한병철의 ‘피로사회’에서 ‘멋진 신세계’가 언급된 적이 있었던가? 만약 아니라면 그는 책 첫장에 알더스 헉슬리 앞으로 이 책을 헌정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두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비슷하게 느껴졌다. ‘부정성이 제거된 채로 완전히 매끈해진 무한긍정의 사회’가 바로 그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피로사회의 일원이 끊임 없이 스스로를 착취하며 탈진의 상태로 돌진하는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이고, 멋진 신세계의 일원은 스스로를 착취할 능력이나 의지 자체가 없다. 모든이는 조건유도 된 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하다. 사회는 안정적이고 이따끔 궤도에서 이탈하는 자들은 교화의 대상이 되거나 추방된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고 꿈 꿀 자유의 박탈은 사실 집정관이 행하는 그 어떤 착취보다도 끔찍한 것이었다. 누가 그들에게 그런 권리를 허락했단 말인가? 그렇기에 에너지로 넘치고 활기찬 인간들 가운데 홀로 우울한 버나드 마르크스의 얼굴은 역설적으로 어떤 희망을 상징한다. 적절한 우울은 자기 자신을 보게 해주고 자기기만의 위험으로부터 방패 역할을 해준다. 또한 이런 세상 속에서 작가가 헬름홀츠를 글 쓰는 사람으로, 야만인을 책 읽는 사람으로 설정한 것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 멋진 신세계의 이상 뒤에는 철저한 경제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헨리 포드를 건국의 아버지이자 신적인 존재로 등장시킨 것은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한다. 멋진 신세계에서 이뤄지는 모든 활동은 생산과 소비에 증진으로 이어질 때만 유의미한데, 이것은 한병철이 그의 저서들에서 반복적으로 지적하듯 속도와 편의성, 생산성, 효율의 극대화를 향해 달려가는 테크놀로지의 종착점을 예언하는 듯 하다. ‘승객’으로서의 인간만 남게 될 무인자동차를 생각해보자면, 개별적으로 놓고봤을 때 이 기술이 사회에 필요한 나름의 명분은 충분하다. 적어도 인간의 오류를 최소화시킨 무인자동차의 네트워크에서 내가 불의의 차사고를 당할 확률은 확연히 낮아질 것이다. 무인자동차의 혜택이 이게 전부란 말은 아니지만, 어쨌든 말하자면 멋진 신세계가 추구하는 ‘안정된 사회’에 한발짝 다가서는 것이다. 문제는 개별적으로 놓고 봤을땐 나름의 타당한 존재의 이유를 가진 점진적 개선들이지만 크게 놓고보면 그들 가운데 어떤 지향점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일테다 (석사때 공부한 Technological determinism이 드디어 이해되는 순간. 그리고 기술발전의 운전수는 경제논리와 진보를 향한 인간의 통제 불가능한 열망이 있다.) 그 종착지가 바로 ‘매끈한 사회, 멋진 신세계의 건설’은 아닐까. 그곳엔 레니나에 다가가지 못해 전전긍긍하며 버나드가 느낀 불안과 거절감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헬름홀츠가 말과 글로 표현하길 원했던 그 무언가에 대한 갈증도 존재하지 않는다.

– 더 나은 기술의 개발은 인류의 진보와 동일시 되어져왔고 어떤 의미에서 멋진 신세계는 이미 도래했다. 삶은 대체 얼마나 더 빠르고 편리해져야 하는가? 작품 속 소마 알약은 지금 내 삶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가? 우리에겐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이 필요하다.

–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해 꼭 얘기를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 드물게도 이 책에선 원작자보다 번역자의 약력이 더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소설의 경우 사실상 2차 창작물이라고 봐야하기 때문에 이해 못할 일은 절대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이 번역의 퀄리티는 그걸 정당화시켜주지 못한다. Feelies를 ‘촉감영화’로 번역한 건 나름 흥미로웠지만 ‘헬름홀츠와 버나드의 공통점은 그들이 혼자였다는 것이다 (120페이지) ’에서 사용한 ‘individuals’란 단어는 그들이 시스템에 속해 있으면서도 자신을 ‘하나의 개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내용으로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되는데 그걸 ‘혼자’라고 번역해버린 결정엔 동의하기 힘들다.

무인도에 가져 갈 책이라고 해서 처음엔 생존을 위한 실용적 가치를가진 책들을 떠올렸다. (정재승 교수가 선택한 ‘도구와 기계의 원리’가 바로 그런 책이 아닌가.) 내게 있어 무인도에서의 독서행위는 사치를 넘어 거의 무의미함에 가깝지 않을까. 일단 책을 읽은 후 느끼는 지적 만족감을 표현할 상대가 없다. 관계할 인간이 부재한데 영혼과 지성을 살찌워봐야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난 순수한 자기만족을 위해 독서할만큼 쿨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무인도에서의 책은 생존 자체를 위한 – 예를 들자면 불을 피우기 위한 – 재료로서 가장 유용한 가치를 가진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구글로 ‘가장 두꺼운 책’을 검색해본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처음 눈에 띄지만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땔깜으로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영어로 다시 검색해본 결과, 기네스북에 등재된 가장 두꺼운 책은 영국출판사 하퍼콜린스에서 2009년 출간시킨 아가사 그리스티의 ‘Miss Marple Stories’로서 무려 4032페이지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불을 피우기 위해 하루 10장의 종이를 사용한다는 가정하에 약 202일간 나의 생존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단순 페이지수가 아닌 면적으로 계산한다면 다른 결과가 나오겠지만 그런걸 계산하고 있기엔 내 인생이 너무 짧다!)
그러나 책에 대한 사랑을 종종 고백해온 나름 애서가인 내가, 읽어보지도 않은 책을 태운다는 것은 아가사 크리스티에게 실례이고 (사실 추리소설에 취향이 없어 그녀의 책을 한권도 읽어본 적이 없다) 더 나아가 책에 대한 모독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옳지 않다. 따라서 난 내 비루한 책장으로 시선을 돌려 이중 가장 태워버리고 싶은 책을 찾는다. 평소 책을 매우 지저분하게 읽는 나는 한달 전쯤 알랭 코르뱅의 ‘침묵의 예술’을 읽으며 딱 두번 밑줄을 그었다. 이 독서경험은 나로하여금 아무리 대단한 지성인도 가끔은 자기가 무슨말을 하는지 잘 모르고 책을 쓰는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느끼게 했다. 흡사 지 잘난 맛에 사는데 말까지 많은 친구와 단둘이 집에 가게 됐는데 기차가 끝없이 딜레이 되는 상황같았다. 사실 이 책에 대한 나의 평가엔 아마도 프랑스 문화에 대한 나의 무지가 큰 영향을 끼쳤을테지만, 어쨌든 '소음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침묵을 배우다’라고 쓴 이 책의 편집자는 아마 이 책을 읽어보지 않은게 분명하다. 난 이 책에서 어떤 지적도전도 받지 못했고, 주저없이 이 책으로 10일간 따뜻한 밤을 보내길 선택할 것이다.

'무인도에 가져갈 만큼 애정하는 책’을 소개하려 했는데 의식의 흐름을 따르다보니 서론이 본론이 되어버렸다. 약간의 고민 끝에 나는 ‘스토너’를 떠올렸다. 세상에 별다른 족적도 남기지 못한 어떤 이의 삶과 죽음을 통해 한 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며, 무인도에서의 삶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실용적 가치까지 갖춘 책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매우 드물게도 내가 두번을 완독한 책이다. 이외에도 ‘개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책이 몇권 더 떠오르는데 다니엘 페나크의 ‘몸의 일기’는 내가 아직 인간임을 계속 상기시켜 줄 책이고,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과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도 모두 좋은 책이니… 이중 가장 두꺼운 책을 고르면 될 것이다😂 이승우 작가의 '사랑의 생애'엔 매우 드물게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 책을 틈틈히 읽으면 적어도 톰 행크스처럼 배구공과 사랑에 빠지는 난감한 상황은 피할 수 있겠지.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도 생각났는데 이 책은 1권밖에 읽지 못해서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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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기사가 도망치려다 우연히 만나게 된 노파가 병원에서 아들의 행방을 찾는 그 장면부터 울었다. 그리고 계속 울었다. 그건 아마도 총 앞에서 힘 없이 쓰러져간 사람들, 죽을만큼 두려웠지만 인간 내면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 여전히 믿고 싶은) 그 소리를 외면하지 못해 그곳에 서있기를 선택한 그들, 그 얼굴에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김xx, 박xx 같은 이름이 아니라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뭉개져 그저 ‘시체’로 기억되어 있던 그 책자속의 얼굴들을 비로소 마주한 듯한 그 기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영어제목은 ‘A Taxi Driver’. 즉, ‘한 택시운전사’이다. 고유명사로서의 ‘The’ 택시운전사, 슈퍼히어로가 아닌 수 많은 택시운전사들 중 하나일 뿐이란 점은 아마도 번역자가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에 대해 명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단 점을 시사한다. 마지막까지 본명조차 밝혀지지 않은 택시 드라이버는 2017의 오늘을 살고 있는 내게 묻고 있다. 너는, 어디에 서 있겠느냐고. 너도 순천에서 유턴해 돌아오겠느냐라고. (그런 의미에서 영화속 송강호가 총알 사이를 뚫고 부상자를 영웅적으로 구출해 내는 그런 장면은 없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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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갈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소년이온다, 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