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읽다’

몇달전을 기점으로 나에게 일어난 기분좋은 변화의 ,말하자면, 시작을 알린 책.
이 책을 읽은지 얼마 되지 않아 독일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소년이 온다’를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읽었고, ‘빨간 책방’ 포드캐스트가 눈에 들어왔고 (그것은 아마 항상 사정권에 있었지만 내가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리라), 본격적으로 소설에 빠져들었다.

소설에 빠진 것은 단순히 다른 장르의 책을 읽기 시작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밑에 quote에서 필자가 말했듯이 무의미해 보이는 것, 비효율, 비생산을 향해 마음을 여는 것이고 그에 따르는 불안감으로부터 의식적으로 자유하는 것이다.

‘그러니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주제나 교훈을 얻기 위함도 아니고, ‘감춰진 중심부’ (소설과 타 문학의 차이)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도 아닙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분명히 어떤 교훈을 얻은 것 같기도 하고, 주제를 찾아낸 것 같기도 하고, ‘중심부’를 열심히 찾아 헤매다 얼추 비슷한 곳에 당도한 것도 같은데, 막상 다 읽고 나면 그게 아니었단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소설을 읽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헤매기 위해서일 겁니다. 분명한 목표라는 게 실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이상한 세계에서 어슬렁거리기 위해서입니다. 소설은 세심하게 설계된 정신의 미로입니다. 그것은 성으로 향하는 K의 여정과 닮았습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성’)저멀리 어슴푸레 보이는 성을 향해 길을 따라 걸어가지만 우리는 쉽게 그 성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대신 낯선 인물들을 만나고 어이없는 일을 겪습니다.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을 경험하기도 하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를 곰곰히 짚어보기도 합니다 … 작가가 써놓은 문장에 탄복하기도 하고, 예리한 인물 묘사에 공감하기도 하고, 주인공이 처한 고난에 가슴 아파하기도 합니다 … 때로 이성에 이끌렸다가 때로 감성에 이끌렸다가 하면서 우리의 정신은 책 속에 구현된 그 이상한 세계를 점차 이해해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세계의 일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좋은 독서란 한 편의 소설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작가가 만들어 놓은 정신의 미로에서 기분좋게 헤매는 경험입니다.’

‘누군가는 물을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소중하다. 그런 귀중한 시간을 들여 소설을 읽는다면 뭔가 얻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마 플로베르라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 그 아까운 시간을 들여 고작 바람피우면죽는다 같은 교훈이나 얻는다면 그거야말로 시간의 낭비다.’ 우리는 화폐경제에서 살아기가 때문에 교환이 불가능한 것들은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 일상이라는 무미건조한 세계 위에 독서와 같은 정신적 경험들이 차곡차곡 겹을 이루며 쌓이면서 개개인마다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 현대의 기업들은 우리를 빅데이터의 한 점으로 봅니다. 우리의 개성은 몰각되고 행위만이 의미 있습니다. 우리가 더이상 물건을 사지 않고, 인터넷에 접속하지도 않으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몰개성적 존재로 환원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안에 나만의 작은 우주를 건설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 그것들이 조용히 우리 안에서 빛날 때, 우리는 인간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세계와 맞설 존엄성과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소설이 이렇게 엄연한 자연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면, 독자는 이 자연을 어떻게 인식하고 경험하는 것일까요? 독자들은 이런 책들과 어떤 투쟁을 벌이는 것이며, 그런 도전의 결실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제가 ‘롤리타’나 ‘죄와 벌’, ‘이방인’ 같은 작품을 읽으며 무수히 떠올린 질문들이었습니다. 이런 소설들을 읽는 것은 정신적으로 높은 수준의 긴장을 요구합니다. 윤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주인공과 그들의 행위를 받아들이는 것도 어렵고,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감당하는 것도 힘겹습니다 … 바로 이순간 밀란 쿤데라가 ‘소설은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이라고 정의한, 바로 그 의미를 실감하게 됩니다 … 그러니 독자는 작가와 일종의 합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소설을 다 읽을 때까지 일단 도덕적 판단은 유보하겠다’라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그 윤리적 판결과 별개로 작품의 매력이라는 다른 차원이 존재합니다. 주인공이 치료가 필요한 변태성욕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롤리타’가 쓰레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의 매력은 우리로 하여금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우리는 뫼르소와 험버트 험버트, 하스콜니코프와 정신적 힘겨루기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도덕하거나 사회적 통념과는 벗어난 행동을 하는 인물의 이야기에 나는 왜 매력을 느끼는가? 나는 괴물인가? 혹시 나는 너무 어두운 심연을 지나치게 오래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평범하고 도덕적인 삶은 사는 내가 이런 이야기에 매혹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 … 그렇다고해서 그 책을 읽는 우리의 자아가 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책들을 읽고 다면 독자의 자아는 읽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런 인물과 사상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 위대한 작품들은 자아의 일부를 대가로 지불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 등산가는 높은 산을 오르면서 더욱 경험이 풍부하고 강해집니다. 때로 극심한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다시 산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들이 풍부한 경험을 쌓고 강해지기 위해 산에 가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들은 산에서 겪는 경험을 사랑할 뿐입니다.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왜 산을 오르냐는 질문에 ‘거기 산이 있으니까’로 답했는데요. 이 단순한 답이 지금까지 희자되는 것은 그것이 산에 오르는 사람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기 때문일 겁니다 … ‘자, 근육량을 늘리고 건강해지기 위해 헬스클럽에 가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간과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소설을 읽자’라고 결심하는 것은 어딘가 부자연스럽습니다 … 독자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그 어떤 분명한 유익도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소설을 읽은 사람으로 변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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