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 Do It

연말까지 일을 안하는 대신 혼자 뭔가를 만들어 보겠다며 살고 있다. 나이 30, 남들은 한참 커리어 쌓고 있을 시점에 어찌보면 참 사치스런 시간인데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나름의 의미가 있다. 자기주도적인 시간으로 뭔가를 만들어보겠다는 계획을 제대로 실행해본 성공경험이 부족하다고 항상 느껴왔기 때문.

서두에 이런 글을 쓰면 어떤 소기의 성과를 친구들에게 알리기 위한 글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서두는 단지 페이크였을 뿐 어제 나는 간만에 영걸전이라는 게임을 즐겼다. 할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는데 참으로 미친짓이 아닐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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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걸전은 어떤 게임인가, 이번 대학 새내기가 태어나기도 전 1995년에 발매된 도스게임으로서, 나에게 586컴퓨터와 영걸전은 같은 의미라고 할수 있다. (이 글을 읽으며 도스가 뭐고 586이 뭔지에서 막히신 분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세요ㅜㅜ) 처음으로 가지게 된 586컴퓨터에 영걸전이 깔려 있었기 때문. Hero.com으로 실행이 가능했다. 그때 세틀러2와 어떤 괴악스런 토끼가 총을 쏴대는 게임도 함께 인스톨되어 있었는데 하여튼..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게임이기도 하다. 특히 2장막판에 장판파에서 백성달고 피난해야하는 스테이지는 눈물 없이는 플레이가 힘들다. 그야말로 안구정화 게임…

어쨌든, 그저께 저녁에 시작해서 새벽 3시까지 하다가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오늘 새벽 2시까지 연달아 게임을 했다. 시계를 한 두번쯤 본 듯. 약 24시간동안 게임을 하면서 한끼 먹었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여기서부터 약간 의아할탠데, 일단 나에겐 약간의 저혈압 증세가 있어서 끼니를 거르면 손부터 떨고 정상적인 생활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즘 허리랑 목이 아프고 랩톱으로 문서작업을 하도 해서 손가락 근육도 몇개 오작동 중인데 이걸 24시간동안 한번도 느끼질 못했다. 페이스북, 카톡, 이메일, 웹툰.. 하루에 적어도 한두번이상은 체크하는 것들이 전혀 생각도 안났다. 즉 꼬박 1.5일은 안먹고 안자고 게임을 했다는건데,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되겠지만 난 여기서 크나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정말 집중을 하게되면 주변 환경적인 요소는 정말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 말한 몸이 불편하다던지 배가 고프다던지 하는 문제들 외에도 내게는 작업을 할때 일정 수준 이상의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을 때가 많은데 시간활용을 효율적으로/영리하게 하려다가 결과적으로 이도저도 아닌 상황이 종종 발생하는거다. (예를들면 앞에서 했던 일과 연결시켜서 흐름을 가져가려 한다던지 혹은 머리가 찌뿌둥하기 때문에 효율이 안나오니 밖에 나가서 환기를 시킨다던지 등등..) 실재로 45분 작업- 15분 휴식 같은 방법론은 너무도 유명하다. 근데 지금 내게 드는 생각은, 우리가 소히 말하는 ‘the zone’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저런 방법론을 필요로 하게 된 건 아닌가, 이 말이다.

그렇다면 고민해볼 수 있는 문제는, 영걸전의 무엇이 그렇게 특별했는가 하는 사실이다. 두가지 정도를 생각해볼 수 있었는데.

1. 영걸전의 중요한 요소는 스토리텔링이다. 내가 아주 익숙하고 즐겨봤고 지금도 그러한 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의 스토리에 나를 던지는 경험 자체가 몰입을 가능케한다.
2.더 중요한 요소는, 게임에는 분명한 엔딩이 있고 유져는 그 엔딩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직시한다. 현실에선 아무리 분명하고 quantify할 수있는 목표를 세운다고해도 거기엔 불확실성이 따르고 일정 수준의 모호함이 있지만 여기선 다르다. 중간 과정에서 경험하는 실패도 분명한 ‘끝’을 향한 과정의 일부로 쉽게 치환된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인간을 산만하게 만든다는 문제의식을 꽤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나다. 실재로 스마트폰을 위시한 많은 최신 기술의 경우 사람의 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컨트롤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determinist적인 입장도 있다. (흥미로운건, 이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지극히 지협적인 고민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 예로 소크라테스는 문자의 발명이 인간을 바보로 만들 것이라고 반대했다는데 문자 또한 인간의 뇌를 어떤 식으로든 변화시켰을 것이고 이건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 한 연구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은가?) 여기서 빠저나와보려고 지난 몇달간 폰없이도 살아봤지만 gadget의 부제가 즉각적인 몰입과 깊이로 이어지진 않았다. 이런 주제에 대한 책은 시중에도 여러권 나와 있지만 그걸 몸으로 느끼고 체화시키는 것은 분명 경험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어제의 경험은 신선했고 나름의 격려가 되었다(?). 깊이로의 길, 몰입의 능력이 내 안에 분명 살아있다는 반증이다. 몸으로 생생히 느낀 어제를 가능한 기억해내고 싶어서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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