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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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시작되는 시점은 A.F (즉 포드년) 632년, 즉 우리 기준으로 25세기로 설정 되어 있는데 헉슬리가 상상한 600년 후의 테크놀로지는 이미 현시점에서 상당부분 코믹할 정도로 낡아보인다. (안테나의 사용이나 초고속 이동수단으로 헬리콥터가 등장하는 등.. 물론 작품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조건유도 등의 인간공학기술은 적어도 아직 실현단계는 아니지만) 이것은 20세기 초반의 헉슬리가 체감한 진보의 속도를 다음 100년간 인류가 아득히 뛰어넘었다는 반증이 될 수 있는데, 책 출간후 15년이지난 1947년에 다시 쓴 머릿글에서 헉슬리가 책에서 예견한 ‘멋진 신세계’를 100년후로 재조정한 것은 흥미롭다.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그 사이에 일어난 굵직한 사건은 2차대전 정도가 생각나는데, 머릿글의 내용으로 짐작해보자면 (“원자력이라는 비인간적인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이 이루는 모든 기존과정들이 붕괴되고 새로운 형태들이 생겨나야하리라” ) 아마 원자력과 핵개발등이 그에게 큰 충격을 줬다는 생각이 든다. 헉슬리와 동시대 인물인 마틴로이드존스 목사의 설교집을 읽어보면 이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핵시대’에 살고 있다는 표현을 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충격적인 신기술의 등장으로 세상이 완전히 변할 것이라는 기대감 그리고 불안함이 공존했던 시대였을 것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 3장에서 버나드/국장/레니나의 대화를 교차편집한 부분은 매우 영화적 연출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챕터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은데, 이외에도 눈에 띄는 작법이 있다면 책 전반에 걸쳐 반어법을 사용한다는 점. 화자는 혼자가 되는 것, 고독, 생각, 질문, 독서, 가족, 역사등 멋진 신세계에서 죄악시되는 가치들을 거의 조롱하다시피 하는데, 이는 역으로 저자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을 드러내고 강조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그려지는 멋진 신세계 속 야만인의 존재를 통해 정상/비정상의 경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환기시키는 방식은 얼마전에 읽은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를 생각나게 한다.

– ‘멋진 신세계’보다 17년 늦게 쓰여진 조지 오웰의 ‘1984’와의 비교는 당연히 불가피하다. 권력의 작동방식에 대한 미쉘 푸코의 말을 빌리자면, 과거 모두에게 보이는 ‘힘을 과시하는’ 공개적 방식으로 작동하던 권력은 고도화 되어가는 사회에서 한계에 직면하자 개인으로 하여금 ‘감시자’를 내면화시키도록 훈육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Big Brother is watching you’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통해 더욱 대중화된 오웰의 ‘감시사회’도 이젠 지나간 메타포처럼 보인다. 이젠 헉슬리의 목소리에 더 힘이 실린다.

– 한병철의 ‘피로사회’에서 ‘멋진 신세계’가 언급된 적이 있었던가? 만약 아니라면 그는 책 첫장에 알더스 헉슬리 앞으로 이 책을 헌정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두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비슷하게 느껴졌다. ‘부정성이 제거된 채로 완전히 매끈해진 무한긍정의 사회’가 바로 그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피로사회의 일원이 끊임 없이 스스로를 착취하며 탈진의 상태로 돌진하는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이고, 멋진 신세계의 일원은 스스로를 착취할 능력이나 의지 자체가 없다. 모든이는 조건유도 된 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하다. 사회는 안정적이고 이따끔 궤도에서 이탈하는 자들은 교화의 대상이 되거나 추방된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고 꿈 꿀 자유의 박탈은 사실 집정관이 행하는 그 어떤 착취보다도 끔찍한 것이었다. 누가 그들에게 그런 권리를 허락했단 말인가? 그렇기에 에너지로 넘치고 활기찬 인간들 가운데 홀로 우울한 버나드 마르크스의 얼굴은 역설적으로 어떤 희망을 상징한다. 적절한 우울은 자기 자신을 보게 해주고 자기기만의 위험으로부터 방패 역할을 해준다. 또한 이런 세상 속에서 작가가 헬름홀츠를 글 쓰는 사람으로, 야만인을 책 읽는 사람으로 설정한 것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 멋진 신세계의 이상 뒤에는 철저한 경제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헨리 포드를 건국의 아버지이자 신적인 존재로 등장시킨 것은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한다. 멋진 신세계에서 이뤄지는 모든 활동은 생산과 소비에 증진으로 이어질 때만 유의미한데, 이것은 한병철이 그의 저서들에서 반복적으로 지적하듯 속도와 편의성, 생산성, 효율의 극대화를 향해 달려가는 테크놀로지의 종착점을 예언하는 듯 하다. ‘승객’으로서의 인간만 남게 될 무인자동차를 생각해보자면, 개별적으로 놓고봤을 때 이 기술이 사회에 필요한 나름의 명분은 충분하다. 적어도 인간의 오류를 최소화시킨 무인자동차의 네트워크에서 내가 불의의 차사고를 당할 확률은 확연히 낮아질 것이다. 무인자동차의 혜택이 이게 전부란 말은 아니지만, 어쨌든 말하자면 멋진 신세계가 추구하는 ‘안정된 사회’에 한발짝 다가서는 것이다. 문제는 개별적으로 놓고 봤을땐 나름의 타당한 존재의 이유를 가진 점진적 개선들이지만 크게 놓고보면 그들 가운데 어떤 지향점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일테다 (석사때 공부한 Technological determinism이 드디어 이해되는 순간. 그리고 기술발전의 운전수는 경제논리와 진보를 향한 인간의 통제 불가능한 열망이 있다.) 그 종착지가 바로 ‘매끈한 사회, 멋진 신세계의 건설’은 아닐까. 그곳엔 레니나에 다가가지 못해 전전긍긍하며 버나드가 느낀 불안과 거절감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헬름홀츠가 말과 글로 표현하길 원했던 그 무언가에 대한 갈증도 존재하지 않는다.

– 더 나은 기술의 개발은 인류의 진보와 동일시 되어져왔고 어떤 의미에서 멋진 신세계는 이미 도래했다. 삶은 대체 얼마나 더 빠르고 편리해져야 하는가? 작품 속 소마 알약은 지금 내 삶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가? 우리에겐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이 필요하다.

–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해 꼭 얘기를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 드물게도 이 책에선 원작자보다 번역자의 약력이 더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소설의 경우 사실상 2차 창작물이라고 봐야하기 때문에 이해 못할 일은 절대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이 번역의 퀄리티는 그걸 정당화시켜주지 못한다. Feelies를 ‘촉감영화’로 번역한 건 나름 흥미로웠지만 ‘헬름홀츠와 버나드의 공통점은 그들이 혼자였다는 것이다 (120페이지) ’에서 사용한 ‘individuals’란 단어는 그들이 시스템에 속해 있으면서도 자신을 ‘하나의 개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내용으로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되는데 그걸 ‘혼자’라고 번역해버린 결정엔 동의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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