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예전엔 책장을 보면 뿌듯했다. 열심히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이 절반이어도 형형색색 잘 배열 해놓은 책들을 보고만 있으면 아직 가보지 않은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배가 불렀다. 그리고 그걸 게으른 지적 허영심이라고 부른다는 걸 깨닫게 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이젠 책장은 내게 있어 삶에게 진 빚과 같은 의미, 내가 바라는 나와 거기에 못미치는 나 사이의 간격 그 자체. 그래서 보고 있으면 뭔가 간질간질거리는 조바심에 속이 쓰리다. 아마 넌 평생 여기서 자유하지 않기를 선택할게라고, 책들이 말하는건지 내가 되뇌이는건지 모를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말이지! (베를린에서 이사하면서 인쇄책의 불편함을 느껴 ebook을 실험중이다 – 결국 거의 다 두고 왔다 – 한동안 Ebook으로 책을 모았더니 눈으로 느껴지는 죄책감은 줄었으나 잔뜩 사놓고 책 자체를 아예 잊어버리게 되는 부작용이..)

뒤늦은 라라랜드 후기

– 먼저, 마법 같은 시간을 선사해준 데미안 샤젤에게 박수를. 영화 혹은 소설, 어떤 이야기속에 너무나 깊이 몰입하면 – 마치 온몸을 사용해서 보고 들은 것처럼 – 실재로 몸이 물리적 피로를 느낄 때가 있다. (가장 최근 이런 경험을 했던 게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나서였는데 그땐 말그대로 몸이 두들겨 맞은 듯 축 늘어지는 것 같았다.) 더구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엄청난 기대와 hype를 가지고 작품을 대했으니 이런 경험은 더욱 흔치 않다.

– 모두가 꼽는 이 영화 최고의 명장면은 마지막 플래쉬백이겠지만 내 마음이 가장 격하게 동했던 순간은 미아의 마지막 오디션씬이다. 실재로 같이 영화를 관람한 친구 중 하나가 2주후 미국에서 드라마스쿨 오디션을 보는 배우지망생이었다는 재밌는 우연 때문이었을까. 미아의 초조함과 두려움 뒤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내게 모두 전달 된 기분이었고 그래서 부분적으로 세바스찬보단 미아에게 감정이입이 됐다. 개인적으론 ‘so here’s to..’ 부분을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했을지 궁금.

– 감정이 최고조에 다다르는 이 시점에서 격양된 톤으로 ‘나에겐 꿈이 있어요! 나도 스타가 되고 싶어!’를 결연히 외칠 줄 알았는데 난 이 장면에서 데미안샤젤에게 땡큐!를 외친다. 이 노래는 단지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찬가가 아니었다. 대신 꿈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바보처럼 보이고, 시행착오를 겪어 본 사람들을 위한 노래였다. 멀쩡하게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나와 6년동안 아무런 성과 없이 문을 두드렸던, 절박한 마음으로 빚까지 내면서 1인극을 준비한 미아였기에 부를 수 있는 노래였다. 생각해보니 내 마음이 아팠던 건 그때문이었을지도. 듣는이로서는 동했으나 내 노래라 부르기엔 부끄럽겠다 싶어서.

– 세바스찬의 그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재즈바에서 징글벨을 연주할 때 한번, 풀장에서 Take On Me를 연주할 때 한번, 그리고 새 밴드와의 첫 합주 때 한번. ‘I don’t belong here’라고 말하는 듯한 어색한 표정에 나도 피식 웃었지만 그건 영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이었다. 적어도 나한텐 그랬다. 생존의 문제와 누군가에 대한 책임감 앞에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멀어지는 기분. 나 또한 그 갈림길에 서 있다.

– 뮤지컬 장면이 끝나면 격한 안무 뒤 여전히 헉헉 거리는 배우가 바로 대사를 치는 식의 구성이 흥미로웠다. 그건 우리 매일의 일상도 깔끔하게 정돈된 choreography가 없을 뿐, 매순간이 뮤지컬과 다르지 않다는 얘기가 아닐까. 말하자면 예술의 일상성.

– 그런 의미에서 (내 기억으론) 영화중 유일하게 뮤지컬과 현실이 분리되는 마지막 회상씬이 더욱 흥미로웠다. 이 장면 때문에 어떤 이는 이 영화를 ‘슬픈 결말’이라 말하기도 했다. 꿈을 이뤘으니 ‘해피 엔딩’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이 영화는 그런 식의 결말을 짓는 것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 그저 삶은 선택의 연속일 뿐이며 선택은 끊임 없이 배제하는 것이라고 매우 담담하게 얘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  라라랜드와 ‘담담’이란 형용사가 함께 사용된다는 데 누군가는 의아해 하겠지만 난 그랬다. 달콤과 씁쓸함, 환상과 지독한 현실이 공존하는 그런 이야기. 하지만 삶의 결국에 대한 긍정이고 찬가로 마무리 된다.  그래서 결말에 대해 굳이 편리하게 얘기하자면 난 해피엔딩에 가깝다고 말 할 것이다. 사랑이 이뤄졌다거나 염원하던 꿈을 이뤄서가 아니라, 삶은 계속 되는거니까. 지나고 돌아보면 다 아름답게 남길 수 있는 그런 기억들이 있고, 서툴고 씁쓸했던 결착들이 모여 우리 삶을 더욱 운치있게 만들어주는 거라고. 마지막 두 사람은 그걸 알아 웃을 만큼의 여유가 생겼기에, 결국은 해피엔딩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왜 책을 읽는가 – Charles Dantzig

“우리는 지식을 얻기 위해 역사 회고록이나 정치 프로그램 등을 보기도 하지만 사실 지식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지식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 그래서 단순히 지식을 채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유추능력’이다. 문학 중에서도 특히 픽션은 유추의 형태를 띈다 .. 지성을 넘어 감성에 반응하는 유추를 통해 사물을 이해한 것이 바로 문학이다.”

“함께 말하고 토론하며 싸우기도 하지만, 이치를 따지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는 동지가 된다. 나의 반대자는 나의 형제이다.”

“좋은 독자는 읽으면서 쓴다. 인쇄업자가 남긴 모든 틈새를 이용해서 동그라미를 치고, 밑줄을 그으며 자신의 느낌을 적는다 … 좋은 독자는 문신을 그리는 예술가이다. 책속의 야생성을 조금이라도 자기 그림으로 만들어낸다

“책은 독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저자를 위한 것도 아니다. 책은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책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독자를 위해 만든 책은 독자를 소비자로 간주하고 무언가 의도를 품는다. 그 의도가 누군가를 즐겁게 하려는 것이든, 설득하려는 것이든 그런 책은 친절해진다”

“독서가는 일반적인 믿음과 달리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독서는 누군가의 독백을 듣는 것이며 일종의 대화에 해당한다. 대화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화려한 독백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는 행위이자 상대방의 인내심을 요구하는 행위이다. 평소 멍하게 마비되어 있는, 얼핏 수동적으로도 보이는 우리의 사고는 독서를 할 때 드디어 시동이 걸리기 시작한다. 감수성과 기억력이 맞물린 메커니즘에 의해 활성화된 사고는 온몸을 전율케 만드는 문장들을 만나게 된다. 바로 그 순간 우리 온몸 구석구석에 문학의 향기가 퍼진다.”

“독서는 그 어느 것에도 봉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독서가 위대한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나아갈 때 나는 죽음과 경주를 한다. 이는 다른 모든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왜냐하면 독서의 본질적인 동기이자 유일한 이유, 그것은 바로 죽음과 당당히 결투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과의 결투를 지지하며 앞에서 이끄는 용사들은 바로 작가들이다 … 우리는 항상 실패했지만 결코 굴복하지는 않았다. 작가와 독자는 한 팀이 되어 실패를 향해 나아간다. 왜냐하면 승리는 항상 죽음에게 있기 때문이다.”


 

2년전쯤 읽었다가 메모를 해뒀던 책.

독서를 ‘불멸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투쟁’으로 정의한 샤를 단치의 독서 애찬론에 완전히 마음이 동하진 않았다. 그건 지나치게 거창하다.  허나 한권의 책을 ‘어떤 정보를 뽑아 내야하는 대상’이라 여기는, 내 몸에 배어 있는 태도와의 끊임 없는 싸움이 시작 되었던 게 아마 이 책을 읽고 나서가 아니었나 싶다.

독서 하는 행위를 작가와 독자의 관계적 측면에서 바라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을 초월하여 이루어지고 또 계속 되는 관계라는 관점도 흥미로웠다.

다만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작가들이 계속 언급되었고, 또 저자의 독서 내공이 너무 깊다보니 상당수 예로 든 독서의 동기나 상황들이 공감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초중반부 이후부터는 띄엄띄엄 읽었고 리듬을 잃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

욕망해도 괜찮아

내가 가끔 친구들에게 우스갯 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10년전 쯤 참석한 한 파티에서 친구들이랑 춤을 추다가 일생일대의 수치와 모욕감을 느낀 적이 있었는데 – 믿을지 모르겠지만 그때 어떤 여자애랑 춤 배틀(?)같은 걸 했다는 지금 생각하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 – 그때 이후로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겨버려서 그런 자리들이 불편하고 춤추는 게 어색하다는 이야기.

집에 와서 곰곰히 생각해 보니 반은 맞고 반은 아니었다 (새삼 느끼는건데 자기점검이 없으면 이렇게 스스로 속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어제 손님들을 제법 초대한 송년회를 가지다가 다들 흔드는 분위기에 나만 계속 뺄 수가 없어서 정말 오랜만에 춤 비슷한 걸 흉내냈는데, 딱 봐도 뻣뻣한 모양새로 무아지경 춤을 추는 사람들을 보며 사실 마음 한편으로 부러웠던 것 같다. 베이스가 쿵쾅 거리는 그 순간에도 나는 내가 우스꽝스러워 보이진 않을까 되뇌이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런 취향이 없다고 애초에 선을 그어 놓으면 편리하긴한데 사실 주변 시선이 신경쓰이는 것 뿐이다.

내가 생각해도 난 좀 awkward한 면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잘 정돈된 언어의 사용을 좋아해서 만남 후에는 내가 오늘 뱉어낸 말들을 복기하며 흐뭇해하기도, 좌절할 때도 많다 (물론 후자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주변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를 표출하면서도 남들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재능들이 종종 부럽다. 이런 사람들은 주변의 awkward함까지 통째로 껴안아 품어버린다.

2016 후반기 내 고민의 연장선상으로 2017의 나는 내 안의 욕망들과 좀 더 화목해졌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바라고 원하는 것들을 모두 꺼내보일 수는 없는거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 아니라고 선긋고 점잖은 척 하진 말아야지. 주위 시선은 조금 덜 신경쓰고, 겉과 속이 지금보다 조금 더 일치 했으면 한다. 그게 더 건강한 것 같다.

여섯 시간 남았네. 어쨌든 ‘올해는 더욱 더 철들지 말자’고 했던 연초의 다짐은 꽤나 잘 지킨 것 같아서 뿌듯하다. 크윽..

지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 낙관하라

브렉시트의 충격이 전세계를 휩쓸 당시 난 베를린에 있었는데 며칠 후 ‘솔직히 지금 독일에서 투표해도 같은 결과가 나올 거야’라고 말했던 독일 친구가 생각난다. 독일도 똑같고 정도의 차이일 뿐 다문화/다인종 국가에 가면 어디든 비슷한 상황일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브렉시트/트럼프당선은 미디어가 대표하는 코스모폴리탄한 대도시들 중심의 주류권문화와 비교적 소외된 지역 (혹은 계층)들간에 격차를 수면 위로 드러낸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앞으로도 나와 내 친구들은 ‘믿을 수 없어!’라는 반응들을 보고 들으며 몇년을 보낼거다. 우리 주변엔 비슷한 사람들 밖에 없으니까. 모두가 동등한 1표를 가진 대의민주제에서 ‘다수’라고 믿었던 자들은 ‘소수’였던 것이고, 결과적 ‘소수’의 사회적 영향력이 얼마나 크던 간에 국가는 그 1표가 모여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중 과반수가 현상황이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결과다. 그리고 그들 없이는 나도 지금과 같은 삶은 영위할 수 없다.

그러니까, 내가 자라오고 익숙한 커뮤니티만이 세상의 전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좀 역설적이지만 어떤 의미에선 우물한 개구리였던 거다. ‘무식하고 배타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사람들에 의해 이 나라와 전세계가 망조가 들어간다, 라는 피해의식이나 상대적 우월감에서 빨리 벗어나야한다. 지금 캐나다 이민 웹사이트 서버가 다운 되었다고 하는데, 시민사회는 수십년, 수백년간 자유와 평등을 위해 고뇌해 왔고 영국이 EU를 탈퇴하고 트럼프가 당선 된다고 해서 갑자기 모든 종류의 차별이 합리화 될 만큼 허약하지 않다. 안타까운 결과지만, 체제를 허물겠다고 공약한 이들로 인해 다소 진통을 겪으면서 더 다양한 방향성과 사상들이 드러나 경쟁하고 결국엔 전부 잘 될 거라고 (믿고 싶다).

out of breath

 

모든걸 말로 표현하려다보면 진부해지고 구차해져 결국 멋이 없어질 때가 종종 있다. 침묵과 여백이 차지해야 할 공간을 나의 불완전한 단어들로 빼곡히 채우려다가 호흡곤란이 오는 그런 기분. 우리의 매순간이 시의 언어처럼 온전하길 바라는 건 어디까지나 그저 바램에 불과하겠지만, 어쩌면 매우 간헐적으로나마 그게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믿게 되는 때가 있다. 절제, 압축 된 언어로 사유뿐만 아니라 마음의 온기까지 오롯이 담아내는 사람들, 그들은 소통에 있어서 경제성이나 효율성을 추구했다기보단 그저 시간의 힘을 믿는것처럼 보였다. 불완전한 언어의 힘으로 지금 이순간 마음을 움직이려 애쓰기보단 과장치 않고 담백하게 순간을 그저 담아낼 수 있는 그런 마음의 넓이, 를 나의 빈곤한 어휘로 굳이 표현하자면 그건 ‘용기’에 가까울거다. 난 언제쯤 더 적게 말하여 더 많이 담아낼 수 있을지. 언제나 뒤돌아볼 때쯤이면 내가 뱉어낸 말들 앞에서 한없이 초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