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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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시작되는 시점은 A.F (즉 포드년) 632년, 즉 우리 기준으로 25세기로 설정 되어 있는데 헉슬리가 상상한 600년 후의 테크놀로지는 이미 현시점에서 상당부분 코믹할 정도로 낡아보인다. (안테나의 사용이나 초고속 이동수단으로 헬리콥터가 등장하는 등.. 물론 작품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조건유도 등의 인간공학기술은 적어도 아직 실현단계는 아니지만) 이것은 20세기 초반의 헉슬리가 체감한 진보의 속도를 다음 100년간 인류가 아득히 뛰어넘었다는 반증이 될 수 있는데, 책 출간후 15년이지난 1947년에 다시 쓴 머릿글에서 헉슬리가 책에서 예견한 ‘멋진 신세계’를 100년후로 재조정한 것은 흥미롭다.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그 사이에 일어난 굵직한 사건은 2차대전 정도가 생각나는데, 머릿글의 내용으로 짐작해보자면 (“원자력이라는 비인간적인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이 이루는 모든 기존과정들이 붕괴되고 새로운 형태들이 생겨나야하리라” ) 아마 원자력과 핵개발등이 그에게 큰 충격을 줬다는 생각이 든다. 헉슬리와 동시대 인물인 마틴로이드존스 목사의 설교집을 읽어보면 이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핵시대’에 살고 있다는 표현을 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충격적인 신기술의 등장으로 세상이 완전히 변할 것이라는 기대감 그리고 불안함이 공존했던 시대였을 것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 3장에서 버나드/국장/레니나의 대화를 교차편집한 부분은 매우 영화적 연출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챕터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은데, 이외에도 눈에 띄는 작법이 있다면 책 전반에 걸쳐 반어법을 사용한다는 점. 화자는 혼자가 되는 것, 고독, 생각, 질문, 독서, 가족, 역사등 멋진 신세계에서 죄악시되는 가치들을 거의 조롱하다시피 하는데, 이는 역으로 저자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을 드러내고 강조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그려지는 멋진 신세계 속 야만인의 존재를 통해 정상/비정상의 경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환기시키는 방식은 얼마전에 읽은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를 생각나게 한다.

– ‘멋진 신세계’보다 17년 늦게 쓰여진 조지 오웰의 ‘1984’와의 비교는 당연히 불가피하다. 권력의 작동방식에 대한 미쉘 푸코의 말을 빌리자면, 과거 모두에게 보이는 ‘힘을 과시하는’ 공개적 방식으로 작동하던 권력은 고도화 되어가는 사회에서 한계에 직면하자 개인으로 하여금 ‘감시자’를 내면화시키도록 훈육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Big Brother is watching you’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통해 더욱 대중화된 오웰의 ‘감시사회’도 이젠 지나간 메타포처럼 보인다. 이젠 헉슬리의 목소리에 더 힘이 실린다.

– 한병철의 ‘피로사회’에서 ‘멋진 신세계’가 언급된 적이 있었던가? 만약 아니라면 그는 책 첫장에 알더스 헉슬리 앞으로 이 책을 헌정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두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비슷하게 느껴졌다. ‘부정성이 제거된 채로 완전히 매끈해진 무한긍정의 사회’가 바로 그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피로사회의 일원이 끊임 없이 스스로를 착취하며 탈진의 상태로 돌진하는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이고, 멋진 신세계의 일원은 스스로를 착취할 능력이나 의지 자체가 없다. 모든이는 조건유도 된 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하다. 사회는 안정적이고 이따끔 궤도에서 이탈하는 자들은 교화의 대상이 되거나 추방된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고 꿈 꿀 자유의 박탈은 사실 집정관이 행하는 그 어떤 착취보다도 끔찍한 것이었다. 누가 그들에게 그런 권리를 허락했단 말인가? 그렇기에 에너지로 넘치고 활기찬 인간들 가운데 홀로 우울한 버나드 마르크스의 얼굴은 역설적으로 어떤 희망을 상징한다. 적절한 우울은 자기 자신을 보게 해주고 자기기만의 위험으로부터 방패 역할을 해준다. 또한 이런 세상 속에서 작가가 헬름홀츠를 글 쓰는 사람으로, 야만인을 책 읽는 사람으로 설정한 것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 멋진 신세계의 이상 뒤에는 철저한 경제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헨리 포드를 건국의 아버지이자 신적인 존재로 등장시킨 것은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한다. 멋진 신세계에서 이뤄지는 모든 활동은 생산과 소비에 증진으로 이어질 때만 유의미한데, 이것은 한병철이 그의 저서들에서 반복적으로 지적하듯 속도와 편의성, 생산성, 효율의 극대화를 향해 달려가는 테크놀로지의 종착점을 예언하는 듯 하다. ‘승객’으로서의 인간만 남게 될 무인자동차를 생각해보자면, 개별적으로 놓고봤을 때 이 기술이 사회에 필요한 나름의 명분은 충분하다. 적어도 인간의 오류를 최소화시킨 무인자동차의 네트워크에서 내가 불의의 차사고를 당할 확률은 확연히 낮아질 것이다. 무인자동차의 혜택이 이게 전부란 말은 아니지만, 어쨌든 말하자면 멋진 신세계가 추구하는 ‘안정된 사회’에 한발짝 다가서는 것이다. 문제는 개별적으로 놓고 봤을땐 나름의 타당한 존재의 이유를 가진 점진적 개선들이지만 크게 놓고보면 그들 가운데 어떤 지향점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일테다 (석사때 공부한 Technological determinism이 드디어 이해되는 순간. 그리고 기술발전의 운전수는 경제논리와 진보를 향한 인간의 통제 불가능한 열망이 있다.) 그 종착지가 바로 ‘매끈한 사회, 멋진 신세계의 건설’은 아닐까. 그곳엔 레니나에 다가가지 못해 전전긍긍하며 버나드가 느낀 불안과 거절감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헬름홀츠가 말과 글로 표현하길 원했던 그 무언가에 대한 갈증도 존재하지 않는다.

– 더 나은 기술의 개발은 인류의 진보와 동일시 되어져왔고 어떤 의미에서 멋진 신세계는 이미 도래했다. 삶은 대체 얼마나 더 빠르고 편리해져야 하는가? 작품 속 소마 알약은 지금 내 삶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가? 우리에겐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이 필요하다.

–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해 꼭 얘기를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 드물게도 이 책에선 원작자보다 번역자의 약력이 더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소설의 경우 사실상 2차 창작물이라고 봐야하기 때문에 이해 못할 일은 절대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이 번역의 퀄리티는 그걸 정당화시켜주지 못한다. Feelies를 ‘촉감영화’로 번역한 건 나름 흥미로웠지만 ‘헬름홀츠와 버나드의 공통점은 그들이 혼자였다는 것이다 (120페이지) ’에서 사용한 ‘individuals’란 단어는 그들이 시스템에 속해 있으면서도 자신을 ‘하나의 개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내용으로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되는데 그걸 ‘혼자’라고 번역해버린 결정엔 동의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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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기사가 도망치려다 우연히 만나게 된 노파가 병원에서 아들의 행방을 찾는 그 장면부터 울었다. 그리고 계속 울었다. 그건 아마도 총 앞에서 힘 없이 쓰러져간 사람들, 죽을만큼 두려웠지만 인간 내면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 여전히 믿고 싶은) 그 소리를 외면하지 못해 그곳에 서있기를 선택한 그들, 그 얼굴에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김xx, 박xx 같은 이름이 아니라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뭉개져 그저 ‘시체’로 기억되어 있던 그 책자속의 얼굴들을 비로소 마주한 듯한 그 기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영어제목은 ‘A Taxi Driver’. 즉, ‘한 택시운전사’이다. 고유명사로서의 ‘The’ 택시운전사, 슈퍼히어로가 아닌 수 많은 택시운전사들 중 하나일 뿐이란 점은 아마도 번역자가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에 대해 명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단 점을 시사한다. 마지막까지 본명조차 밝혀지지 않은 택시 드라이버는 2017의 오늘을 살고 있는 내게 묻고 있다. 너는, 어디에 서 있겠느냐고. 너도 순천에서 유턴해 돌아오겠느냐라고. (그런 의미에서 영화속 송강호가 총알 사이를 뚫고 부상자를 영웅적으로 구출해 내는 그런 장면은 없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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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갈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소년이온다, 한강)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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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혼란스러웠던 부분은, 원래 내 취향이 이동진과 잘 맞았던 건 분명한데 빨간책방을 애청한지 1년이 조금 넘은 지금 형성된 나의 취향이 어느 정도까지 이동진화 되어있는 것인지의 부분. 시작하자마자 쓱 읽어내려간 이 책에서 독서에 대한, 예술에 대한 그의 생각에 거의 비판의 여지가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렀다. 가볍게 읽은 탓도 있겠지만 만약 나도 모르게 동화된 것이라면 비평가란 족속들은 참으로 무서운 자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책에서 말한 ‘허무는 독서’보단 ‘쌓는 독서’에 가까웠는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겐 일종의 위로가 되었던 독서 경험이었다. 여러차례 글로 표현했듯 책장이란 내게 있어 현실과 이상의 괴리 자체, ‘reading debt’에서 자유하기가 쉽지 않은 나였기에 본인의 ‘지적 허영심’과 화목한 상태에 있어 보이는 저자의 독서론은 – 예를들면 완독에 대한 강박이라던가 좋은 독서에 대한 그의 생각 –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문학을 읽는 것이 ‘길을 잃어버림’을 위한 것이며 책을 읽는 이유는 그저 ‘책이 거기 있기 때문에’라는 문장은 김영하의 ‘읽다’의 내용과 거의 완전히 같아서 흥미로웠고, ‘(재미를 유지하기 위해)한번에 열권 읽기’라던가 좋은 책을 고르기 위해선 (특히 논픽션의 경우) 목차를 활용하고 저자의 호흡이 딸리는 2/3지점을 살피라는 방법론, 그리고 좋은 비평에 이르고 싶다면 책을 요약하는 연습부터 시작하라는 이야기 등은 당장 적용해 보고 싶은 내용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고독한 경험이지만 그 경험은 감미롭습니다. 게다가 책을 읽을 때 그 고독은 사실 다른 고독과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자 한 자 책을 쓰는 저자의 고독과 한 줄 한 줄 책을 읽는 독자의 고독 사이 … 그 작은 평화 속에 위엄이 있고 위안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연대를 꿈꿉니다.” (p.5)

” ‘있어 보이고’ 싶다는 것은 자신에게 ‘있지 않다’라는 걸 전제하고 있습니다. ‘있는 것’이 아니라 ‘있지 않은 것’을 보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허영이죠. 저는 지금이 허영조차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정신의 깊이와 부피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래서 영화든 음악이든 책이든 즐기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빈 부분을 메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적 허영심일 거에요.” (p.17)

“(문학을 왜 읽어야 하나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간접 경험보다는 직접적인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죠. 그런데 직접적인 경험보다 간접적인 경험이 더핵심을 보게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 특히 소설을 통한 간접적인 체험으로 삶의 문제를 더욱 예리하게 생각할 계기를 갖게 됩니다 … 미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미국에 관한 책을 읽는게 아니라는 거죠. 미국에 직접 가보고도 알 수 없는 것들을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거죠.” (p.30)

“저는 책 읽는 중간중간에 잠시 멈추는 것, 그것도 독서 행위이고, 더 나아가서 그것이 좋은 독서라고 생각합니다 …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들은 대부분 오래 걸리는 시간 자체가 그 핵심입니다 … 독서를 할 때 우리가 선택한 것은 바로 그 책을 읽고 있는 그 긴 시간인 것입니다. (p.57)

“좋은 독서를 위해서는 책을 읽는 자체가 아니라 책을 읽음으로써 나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 그것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독서에서 정말 흥미로운 순간은, 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마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책을 읽을 때 책과 나 사이 어디인가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p.80)

북클럽을 시작하며 정기적인 공구의 기회가 생겼고 킨들을 사용하기까지 하면서 안그래도 부담이 되던 reading debt가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 올라선 상황에서 여러모로 내게 적절한 책이 찾아온 것 같다. 저자 또한 ‘책이 나를 억누르는’ 지금의 나와 같은 시기를 겪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런데 세상에 좋은 책은 너무 많고 앞으로 더 많아 질 것임은 분명하니 그렇다면 그저 자유하고 즐기기를 택한 것이겠지. (저자가 말한 ‘아님 말고’의 자세가 바로 그 핵심이다) 나보다 훨씬 심각한 애서가가 먼저 걸어가 본 길을 가볍게 흝으며 가진 자기모순과의 화해의 시간이었다.

책장


예전엔 책장을 보면 뿌듯했다. 열심히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이 절반이어도 형형색색 잘 배열 해놓은 책들을 보고만 있으면 아직 가보지 않은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배가 불렀다. 그리고 그걸 게으른 지적 허영심이라고 부른다는 걸 깨닫게 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이젠 책장은 내게 있어 삶에게 진 빚과 같은 의미, 내가 바라는 나와 거기에 못미치는 나 사이의 간격 그 자체. 그래서 보고 있으면 뭔가 간질간질거리는 조바심에 속이 쓰리다. 아마 넌 평생 여기서 자유하지 않기를 선택할게라고, 책들이 말하는건지 내가 되뇌이는건지 모를 그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말이지! (베를린에서 이사하면서 인쇄책의 불편함을 느껴 ebook을 실험중이다 – 결국 거의 다 두고 왔다 – 한동안 Ebook으로 책을 모았더니 눈으로 느껴지는 죄책감은 줄었으나 잔뜩 사놓고 책 자체를 아예 잊어버리게 되는 부작용이..)

뒤늦은 라라랜드 후기

– 먼저, 마법 같은 시간을 선사해준 데미안 샤젤에게 박수를. 영화 혹은 소설, 어떤 이야기속에 너무나 깊이 몰입하면 – 마치 온몸을 사용해서 보고 들은 것처럼 – 실재로 몸이 물리적 피로를 느낄 때가 있다. (가장 최근 이런 경험을 했던 게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나서였는데 그땐 말그대로 몸이 두들겨 맞은 듯 축 늘어지는 것 같았다.) 더구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엄청난 기대와 hype를 가지고 작품을 대했으니 이런 경험은 더욱 흔치 않다.

– 모두가 꼽는 이 영화 최고의 명장면은 마지막 플래쉬백이겠지만 내 마음이 가장 격하게 동했던 순간은 미아의 마지막 오디션씬이다. 실재로 같이 영화를 관람한 친구 중 하나가 2주후 미국에서 드라마스쿨 오디션을 보는 배우지망생이었다는 재밌는 우연 때문이었을까. 미아의 초조함과 두려움 뒤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내게 모두 전달 된 기분이었고 그래서 부분적으로 세바스찬보단 미아에게 감정이입이 됐다. 개인적으론 ‘so here’s to..’ 부분을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했을지 궁금.

– 감정이 최고조에 다다르는 이 시점에서 격양된 톤으로 ‘나에겐 꿈이 있어요! 나도 스타가 되고 싶어!’를 결연히 외칠 줄 알았는데 난 이 장면에서 데미안샤젤에게 땡큐!를 외친다. 이 노래는 단지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찬가가 아니었다. 대신 꿈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바보처럼 보이고, 시행착오를 겪어 본 사람들을 위한 노래였다. 멀쩡하게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나와 6년동안 아무런 성과 없이 문을 두드렸던, 절박한 마음으로 빚까지 내면서 1인극을 준비한 미아였기에 부를 수 있는 노래였다. 생각해보니 내 마음이 아팠던 건 그때문이었을지도. 듣는이로서는 동했으나 내 노래라 부르기엔 부끄럽겠다 싶어서.

– 세바스찬의 그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재즈바에서 징글벨을 연주할 때 한번, 풀장에서 Take On Me를 연주할 때 한번, 그리고 새 밴드와의 첫 합주 때 한번. ‘I don’t belong here’라고 말하는 듯한 어색한 표정에 나도 피식 웃었지만 그건 영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이었다. 적어도 나한텐 그랬다. 생존의 문제와 누군가에 대한 책임감 앞에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멀어지는 기분. 나 또한 그 갈림길에 서 있다.

– 뮤지컬 장면이 끝나면 격한 안무 뒤 여전히 헉헉 거리는 배우가 바로 대사를 치는 식의 구성이 흥미로웠다. 그건 우리 매일의 일상도 깔끔하게 정돈된 choreography가 없을 뿐, 매순간이 뮤지컬과 다르지 않다는 얘기가 아닐까. 말하자면 예술의 일상성.

– 그런 의미에서 (내 기억으론) 영화중 유일하게 뮤지컬과 현실이 분리되는 마지막 회상씬이 더욱 흥미로웠다. 이 장면 때문에 어떤 이는 이 영화를 ‘슬픈 결말’이라 말하기도 했다. 꿈을 이뤘으니 ‘해피 엔딩’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이 영화는 그런 식의 결말을 짓는 것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 그저 삶은 선택의 연속일 뿐이며 선택은 끊임 없이 배제하는 것이라고 매우 담담하게 얘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  라라랜드와 ‘담담’이란 형용사가 함께 사용된다는 데 누군가는 의아해 하겠지만 난 그랬다. 달콤과 씁쓸함, 환상과 지독한 현실이 공존하는 그런 이야기. 하지만 삶의 결국에 대한 긍정이고 찬가로 마무리 된다.  그래서 결말에 대해 굳이 편리하게 얘기하자면 난 해피엔딩에 가깝다고 말 할 것이다. 사랑이 이뤄졌다거나 염원하던 꿈을 이뤄서가 아니라, 삶은 계속 되는거니까. 지나고 돌아보면 다 아름답게 남길 수 있는 그런 기억들이 있고, 서툴고 씁쓸했던 결착들이 모여 우리 삶을 더욱 운치있게 만들어주는 거라고. 마지막 두 사람은 그걸 알아 웃을 만큼의 여유가 생겼기에, 결국은 해피엔딩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왜 책을 읽는가 – Charles Dantzig

“우리는 지식을 얻기 위해 역사 회고록이나 정치 프로그램 등을 보기도 하지만 사실 지식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지식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 그래서 단순히 지식을 채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유추능력’이다. 문학 중에서도 특히 픽션은 유추의 형태를 띈다 .. 지성을 넘어 감성에 반응하는 유추를 통해 사물을 이해한 것이 바로 문학이다.”

“함께 말하고 토론하며 싸우기도 하지만, 이치를 따지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는 동지가 된다. 나의 반대자는 나의 형제이다.”

“좋은 독자는 읽으면서 쓴다. 인쇄업자가 남긴 모든 틈새를 이용해서 동그라미를 치고, 밑줄을 그으며 자신의 느낌을 적는다 … 좋은 독자는 문신을 그리는 예술가이다. 책속의 야생성을 조금이라도 자기 그림으로 만들어낸다

“책은 독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저자를 위한 것도 아니다. 책은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책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독자를 위해 만든 책은 독자를 소비자로 간주하고 무언가 의도를 품는다. 그 의도가 누군가를 즐겁게 하려는 것이든, 설득하려는 것이든 그런 책은 친절해진다”

“독서가는 일반적인 믿음과 달리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독서는 누군가의 독백을 듣는 것이며 일종의 대화에 해당한다. 대화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화려한 독백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는 행위이자 상대방의 인내심을 요구하는 행위이다. 평소 멍하게 마비되어 있는, 얼핏 수동적으로도 보이는 우리의 사고는 독서를 할 때 드디어 시동이 걸리기 시작한다. 감수성과 기억력이 맞물린 메커니즘에 의해 활성화된 사고는 온몸을 전율케 만드는 문장들을 만나게 된다. 바로 그 순간 우리 온몸 구석구석에 문학의 향기가 퍼진다.”

“독서는 그 어느 것에도 봉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독서가 위대한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나아갈 때 나는 죽음과 경주를 한다. 이는 다른 모든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왜냐하면 독서의 본질적인 동기이자 유일한 이유, 그것은 바로 죽음과 당당히 결투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과의 결투를 지지하며 앞에서 이끄는 용사들은 바로 작가들이다 … 우리는 항상 실패했지만 결코 굴복하지는 않았다. 작가와 독자는 한 팀이 되어 실패를 향해 나아간다. 왜냐하면 승리는 항상 죽음에게 있기 때문이다.”


 

2년전쯤 읽었다가 메모를 해뒀던 책.

독서를 ‘불멸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투쟁’으로 정의한 샤를 단치의 독서 애찬론에 완전히 마음이 동하진 않았다. 그건 지나치게 거창하다.  허나 한권의 책을 ‘어떤 정보를 뽑아 내야하는 대상’이라 여기는, 내 몸에 배어 있는 태도와의 끊임 없는 싸움이 시작 되었던 게 아마 이 책을 읽고 나서가 아니었나 싶다.

독서 하는 행위를 작가와 독자의 관계적 측면에서 바라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을 초월하여 이루어지고 또 계속 되는 관계라는 관점도 흥미로웠다.

다만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작가들이 계속 언급되었고, 또 저자의 독서 내공이 너무 깊다보니 상당수 예로 든 독서의 동기나 상황들이 공감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초중반부 이후부터는 띄엄띄엄 읽었고 리듬을 잃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

우리 기억 속의 색 – 미셸 파스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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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 돌아온지 일주일이 지나 이 글을 쓰는데 내가 책을 다 읽었던 게 한국방문 중이었으니 아마 네달정도가 지났을게다.

책 첫장에 꾹꾹 눌러 쓴 메모가 먼저 눈에 띈다.

‘너무나 흥미로운 주제.
이 책을 통해 내삶 속 알록달록한
기억들이 되살아나길 기대하며.
영권이 런던오는 길에 부탁.
Sep 2015
(책디자인이 정말 맘에든다)’

책 디자인에 대해 좀더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보통 시간이 지나면 띄지가 걸리적거려 버리기 마련인데 이 책의 경우엔 띄지가 책을 완성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심플한 흰색 바탕의 책 커버 위에 띄지를 씌우면 마치 흰 캔버스에 색을 칠한 듯한 모양이 되는 것이다. (덧붙여 한국에서 몇몇 지인에게 이 책을 선물하며 띄지가 몇가지 다른 종류로 나왔다는 것 또한 발견했다.) 또 타이포그라피의 느낌이 아주 좋았는데 프랑스 작가가 ‘색’이란 주제에 대해 논한 책이라는, 일종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전체적 독서 경험에 일부로서 훌륭히 기능했다고 생각한다. 적당히 진지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이 있었고 디자이너가 분명 이 책을 읽고 디자인 했을 것이란 생각이들게 한다. 또 잘 눈에 띄지는 않지만 보통 책장 윗면이나 하단부에 위치하는 breadsrumb이 책장 안쪽에 있었는데, 사용성 측면에서 있어서는 살짝 의문이 붙지만 예상외의 경험으로 독자를 웃음짓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책을 절반쯤 읽은 후에야 발견한 디테일이었기 때문이다. 색덕후인 작가가 한국판의 디자인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수 없지만 아마 꽤 흡족해 하지 않았을까.

본론으로 돌아와, 엇그제 김영하 작가의 ‘읽다’를 통해 소설을 읽는 행위 자체에 대해 생각해 봤다면 오늘 이 산문집을 통해 산문을 읽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넉달이 지나 지금 생각해보니 이 책은 나에게 어떤 ‘이미지’로 남아있다. 색의 역사에 관해 몇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을 배우긴 했지만 (얘를들어 초록색이 흉흉한 색으로 생각 되었던건 초록색 코스튬을 입은 연극배우들이 종종 의문의 죽음을 당했기 때문인데 이건 당시 염색 기술의 한계로 인해 초록색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독성 물질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라던지..) 그 이상의 무엇은 아닌것 같다. 아마도 색에 대한 새로운 지식들을 배우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산문은 어떻게 읽어야하나.
‘이야기 속에서 헤메는’ 경험 자체가 소설 읽기의 목적인 것처럼 산문에서도 굳이 무언가 얻으려 할 필요는 없다. 난 오늘 오랜만에 이 책을 다시 펼치면서 흥미로운 경험을 했는데 저자가 쓴 산문이 마치 ‘우리가 카페에 마주보고 앉아 커피 한잔을 두고 나누는 삶’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에세이 한편을 다시 읽었는데 뭔가 말로 표현하긴 힘들지만 새로운 느낌이 있었다. 지인과 커피 한잔두고 나누는 대화에서 모든 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진 않는다. 하지만 어디서 집중해야 하고 끄덕여 공감을 표시해야 하는지는 느낌으로 안다. 모든 종류의 책을 작가와의 ‘대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치면 산문은 그중에서도 커피/차한잔 놓고 나누는 대화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소설이 나를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에서 완전한 ‘몰입’의 경험을 준다면 산문은 작가 앞에 앉아 있는 나를 여전히 인식하고 있는 상태에 가깝다. 피천득 선생이 수필에 대해 예찬한 글처럼 거기엔 소설과는 다른 일종의 ‘공간’이 있다.

퀄리티 있는 대화, 뭔가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는 대화를 찾는 요즘이다. 독서를 좀더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경험으로 만들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과 훈련이 필요한 요즘이다.

그런 의미에서 dog-ear 해둔 페이지들을 복기하는 건 일단 뒤로 미뤄두고, 이 책은 조금 뒀다가 다시 읽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