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책을 읽는가 – Charles Dantzig

“우리는 지식을 얻기 위해 역사 회고록이나 정치 프로그램 등을 보기도 하지만 사실 지식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지식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 그래서 단순히 지식을 채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유추능력’이다. 문학 중에서도 특히 픽션은 유추의 형태를 띈다 .. 지성을 넘어 감성에 반응하는 유추를 통해 사물을 이해한 것이 바로 문학이다.”

“함께 말하고 토론하며 싸우기도 하지만, 이치를 따지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는 동지가 된다. 나의 반대자는 나의 형제이다.”

“좋은 독자는 읽으면서 쓴다. 인쇄업자가 남긴 모든 틈새를 이용해서 동그라미를 치고, 밑줄을 그으며 자신의 느낌을 적는다 … 좋은 독자는 문신을 그리는 예술가이다. 책속의 야생성을 조금이라도 자기 그림으로 만들어낸다

“책은 독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저자를 위한 것도 아니다. 책은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책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독자를 위해 만든 책은 독자를 소비자로 간주하고 무언가 의도를 품는다. 그 의도가 누군가를 즐겁게 하려는 것이든, 설득하려는 것이든 그런 책은 친절해진다”

“독서가는 일반적인 믿음과 달리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독서는 누군가의 독백을 듣는 것이며 일종의 대화에 해당한다. 대화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화려한 독백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는 행위이자 상대방의 인내심을 요구하는 행위이다. 평소 멍하게 마비되어 있는, 얼핏 수동적으로도 보이는 우리의 사고는 독서를 할 때 드디어 시동이 걸리기 시작한다. 감수성과 기억력이 맞물린 메커니즘에 의해 활성화된 사고는 온몸을 전율케 만드는 문장들을 만나게 된다. 바로 그 순간 우리 온몸 구석구석에 문학의 향기가 퍼진다.”

“독서는 그 어느 것에도 봉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독서가 위대한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나아갈 때 나는 죽음과 경주를 한다. 이는 다른 모든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왜냐하면 독서의 본질적인 동기이자 유일한 이유, 그것은 바로 죽음과 당당히 결투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과의 결투를 지지하며 앞에서 이끄는 용사들은 바로 작가들이다 … 우리는 항상 실패했지만 결코 굴복하지는 않았다. 작가와 독자는 한 팀이 되어 실패를 향해 나아간다. 왜냐하면 승리는 항상 죽음에게 있기 때문이다.”


 

2년전쯤 읽었다가 메모를 해뒀던 책.

독서를 ‘불멸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투쟁’으로 정의한 샤를 단치의 독서 애찬론에 완전히 마음이 동하진 않았다. 그건 지나치게 거창하다.  허나 한권의 책을 ‘어떤 정보를 뽑아 내야하는 대상’이라 여기는, 내 몸에 배어 있는 태도와의 끊임 없는 싸움이 시작 되었던 게 아마 이 책을 읽고 나서가 아니었나 싶다.

독서 하는 행위를 작가와 독자의 관계적 측면에서 바라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을 초월하여 이루어지고 또 계속 되는 관계라는 관점도 흥미로웠다.

다만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작가들이 계속 언급되었고, 또 저자의 독서 내공이 너무 깊다보니 상당수 예로 든 독서의 동기나 상황들이 공감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초중반부 이후부터는 띄엄띄엄 읽었고 리듬을 잃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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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억 속의 색 – 미셸 파스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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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 돌아온지 일주일이 지나 이 글을 쓰는데 내가 책을 다 읽었던 게 한국방문 중이었으니 아마 네달정도가 지났을게다.

책 첫장에 꾹꾹 눌러 쓴 메모가 먼저 눈에 띈다.

‘너무나 흥미로운 주제.
이 책을 통해 내삶 속 알록달록한
기억들이 되살아나길 기대하며.
영권이 런던오는 길에 부탁.
Sep 2015
(책디자인이 정말 맘에든다)’

책 디자인에 대해 좀더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보통 시간이 지나면 띄지가 걸리적거려 버리기 마련인데 이 책의 경우엔 띄지가 책을 완성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심플한 흰색 바탕의 책 커버 위에 띄지를 씌우면 마치 흰 캔버스에 색을 칠한 듯한 모양이 되는 것이다. (덧붙여 한국에서 몇몇 지인에게 이 책을 선물하며 띄지가 몇가지 다른 종류로 나왔다는 것 또한 발견했다.) 또 타이포그라피의 느낌이 아주 좋았는데 프랑스 작가가 ‘색’이란 주제에 대해 논한 책이라는, 일종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전체적 독서 경험에 일부로서 훌륭히 기능했다고 생각한다. 적당히 진지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이 있었고 디자이너가 분명 이 책을 읽고 디자인 했을 것이란 생각이들게 한다. 또 잘 눈에 띄지는 않지만 보통 책장 윗면이나 하단부에 위치하는 breadsrumb이 책장 안쪽에 있었는데, 사용성 측면에서 있어서는 살짝 의문이 붙지만 예상외의 경험으로 독자를 웃음짓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책을 절반쯤 읽은 후에야 발견한 디테일이었기 때문이다. 색덕후인 작가가 한국판의 디자인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수 없지만 아마 꽤 흡족해 하지 않았을까.

본론으로 돌아와, 엇그제 김영하 작가의 ‘읽다’를 통해 소설을 읽는 행위 자체에 대해 생각해 봤다면 오늘 이 산문집을 통해 산문을 읽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넉달이 지나 지금 생각해보니 이 책은 나에게 어떤 ‘이미지’로 남아있다. 색의 역사에 관해 몇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을 배우긴 했지만 (얘를들어 초록색이 흉흉한 색으로 생각 되었던건 초록색 코스튬을 입은 연극배우들이 종종 의문의 죽음을 당했기 때문인데 이건 당시 염색 기술의 한계로 인해 초록색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독성 물질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라던지..) 그 이상의 무엇은 아닌것 같다. 아마도 색에 대한 새로운 지식들을 배우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산문은 어떻게 읽어야하나.
‘이야기 속에서 헤메는’ 경험 자체가 소설 읽기의 목적인 것처럼 산문에서도 굳이 무언가 얻으려 할 필요는 없다. 난 오늘 오랜만에 이 책을 다시 펼치면서 흥미로운 경험을 했는데 저자가 쓴 산문이 마치 ‘우리가 카페에 마주보고 앉아 커피 한잔을 두고 나누는 삶’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에세이 한편을 다시 읽었는데 뭔가 말로 표현하긴 힘들지만 새로운 느낌이 있었다. 지인과 커피 한잔두고 나누는 대화에서 모든 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진 않는다. 하지만 어디서 집중해야 하고 끄덕여 공감을 표시해야 하는지는 느낌으로 안다. 모든 종류의 책을 작가와의 ‘대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치면 산문은 그중에서도 커피/차한잔 놓고 나누는 대화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소설이 나를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에서 완전한 ‘몰입’의 경험을 준다면 산문은 작가 앞에 앉아 있는 나를 여전히 인식하고 있는 상태에 가깝다. 피천득 선생이 수필에 대해 예찬한 글처럼 거기엔 소설과는 다른 일종의 ‘공간’이 있다.

퀄리티 있는 대화, 뭔가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는 대화를 찾는 요즘이다. 독서를 좀더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경험으로 만들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과 훈련이 필요한 요즘이다.

그런 의미에서 dog-ear 해둔 페이지들을 복기하는 건 일단 뒤로 미뤄두고, 이 책은 조금 뒀다가 다시 읽는 걸로.

김영하의 ‘읽다’

몇달전을 기점으로 나에게 일어난 기분좋은 변화의 ,말하자면, 시작을 알린 책.
이 책을 읽은지 얼마 되지 않아 독일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소년이 온다’를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읽었고, ‘빨간 책방’ 포드캐스트가 눈에 들어왔고 (그것은 아마 항상 사정권에 있었지만 내가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리라), 본격적으로 소설에 빠져들었다.

소설에 빠진 것은 단순히 다른 장르의 책을 읽기 시작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밑에 quote에서 필자가 말했듯이 무의미해 보이는 것, 비효율, 비생산을 향해 마음을 여는 것이고 그에 따르는 불안감으로부터 의식적으로 자유하는 것이다.

‘그러니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주제나 교훈을 얻기 위함도 아니고, ‘감춰진 중심부’ (소설과 타 문학의 차이)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도 아닙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분명히 어떤 교훈을 얻은 것 같기도 하고, 주제를 찾아낸 것 같기도 하고, ‘중심부’를 열심히 찾아 헤매다 얼추 비슷한 곳에 당도한 것도 같은데, 막상 다 읽고 나면 그게 아니었단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소설을 읽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헤매기 위해서일 겁니다. 분명한 목표라는 게 실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이상한 세계에서 어슬렁거리기 위해서입니다. 소설은 세심하게 설계된 정신의 미로입니다. 그것은 성으로 향하는 K의 여정과 닮았습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성’)저멀리 어슴푸레 보이는 성을 향해 길을 따라 걸어가지만 우리는 쉽게 그 성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대신 낯선 인물들을 만나고 어이없는 일을 겪습니다.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을 경험하기도 하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를 곰곰히 짚어보기도 합니다 … 작가가 써놓은 문장에 탄복하기도 하고, 예리한 인물 묘사에 공감하기도 하고, 주인공이 처한 고난에 가슴 아파하기도 합니다 … 때로 이성에 이끌렸다가 때로 감성에 이끌렸다가 하면서 우리의 정신은 책 속에 구현된 그 이상한 세계를 점차 이해해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세계의 일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좋은 독서란 한 편의 소설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작가가 만들어 놓은 정신의 미로에서 기분좋게 헤매는 경험입니다.’

‘누군가는 물을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소중하다. 그런 귀중한 시간을 들여 소설을 읽는다면 뭔가 얻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마 플로베르라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 그 아까운 시간을 들여 고작 바람피우면죽는다 같은 교훈이나 얻는다면 그거야말로 시간의 낭비다.’ 우리는 화폐경제에서 살아기가 때문에 교환이 불가능한 것들은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 일상이라는 무미건조한 세계 위에 독서와 같은 정신적 경험들이 차곡차곡 겹을 이루며 쌓이면서 개개인마다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 현대의 기업들은 우리를 빅데이터의 한 점으로 봅니다. 우리의 개성은 몰각되고 행위만이 의미 있습니다. 우리가 더이상 물건을 사지 않고, 인터넷에 접속하지도 않으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몰개성적 존재로 환원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안에 나만의 작은 우주를 건설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 그것들이 조용히 우리 안에서 빛날 때, 우리는 인간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세계와 맞설 존엄성과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소설이 이렇게 엄연한 자연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면, 독자는 이 자연을 어떻게 인식하고 경험하는 것일까요? 독자들은 이런 책들과 어떤 투쟁을 벌이는 것이며, 그런 도전의 결실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제가 ‘롤리타’나 ‘죄와 벌’, ‘이방인’ 같은 작품을 읽으며 무수히 떠올린 질문들이었습니다. 이런 소설들을 읽는 것은 정신적으로 높은 수준의 긴장을 요구합니다. 윤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주인공과 그들의 행위를 받아들이는 것도 어렵고,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감당하는 것도 힘겹습니다 … 바로 이순간 밀란 쿤데라가 ‘소설은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이라고 정의한, 바로 그 의미를 실감하게 됩니다 … 그러니 독자는 작가와 일종의 합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소설을 다 읽을 때까지 일단 도덕적 판단은 유보하겠다’라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그 윤리적 판결과 별개로 작품의 매력이라는 다른 차원이 존재합니다. 주인공이 치료가 필요한 변태성욕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롤리타’가 쓰레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의 매력은 우리로 하여금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우리는 뫼르소와 험버트 험버트, 하스콜니코프와 정신적 힘겨루기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도덕하거나 사회적 통념과는 벗어난 행동을 하는 인물의 이야기에 나는 왜 매력을 느끼는가? 나는 괴물인가? 혹시 나는 너무 어두운 심연을 지나치게 오래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평범하고 도덕적인 삶은 사는 내가 이런 이야기에 매혹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 … 그렇다고해서 그 책을 읽는 우리의 자아가 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책들을 읽고 다면 독자의 자아는 읽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런 인물과 사상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 위대한 작품들은 자아의 일부를 대가로 지불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 등산가는 높은 산을 오르면서 더욱 경험이 풍부하고 강해집니다. 때로 극심한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다시 산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들이 풍부한 경험을 쌓고 강해지기 위해 산에 가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들은 산에서 겪는 경험을 사랑할 뿐입니다.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왜 산을 오르냐는 질문에 ‘거기 산이 있으니까’로 답했는데요. 이 단순한 답이 지금까지 희자되는 것은 그것이 산에 오르는 사람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기 때문일 겁니다 … ‘자, 근육량을 늘리고 건강해지기 위해 헬스클럽에 가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간과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소설을 읽자’라고 결심하는 것은 어딘가 부자연스럽습니다 … 독자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그 어떤 분명한 유익도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소설을 읽은 사람으로 변할 뿐입니다.’

생각하는 늑대 타스케

경영 혹은 생각의 수련법에 관련된 책들에는 크게 흥미가 없는 편인데 (소스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신뢰가 갔던)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되어 지난 5월 한국 체류중 구입한 책.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생각의 습관을 훈련하기 위한 방법론을 제시함에 있어 소설이란 형식을 취했다는 점이다. 필자가 소설의 포맷을 채택한 이유는 아마 기존의 뻔한 포맷을 탈피하여 읽는 이의 몰입을 돕기 위해서 일것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일기 형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술술 읽혔던 책이었는데 광고인이라는 필자의 필력도 상당했다. 아마도 책의 궁극적 목적인 방법론 제시를 위해 핵심 bullet points를 먼저 정하고 거기에 맞게 이야기를 구성하지 않았을까 짐작되는데 억지스러운 느낌이 별로 없었다.

늑대 타스케가 제시하는 방법의 핵심은 책중 정차장에 의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듯 ‘더 깊은 생각’. ‘뭔가 다른 생각’을 방해하는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말라는 것 (편견, 상식, 법칙, 프로세스, 고정관념…etc)

전문가의 함정

‘전문가의 의견을 취하면서도 생각의 스취치를 끄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직접 만나든 책에서 읽든) 전문가의 의견을 구하기 전에 나름대로의 결론을 먼저 내려두는 것이 좋습니다. 스스로 내린 결론을 가지고 있으면 적어도 전문가의 의견을 아무 여과 없이 그대로 흡수하는 오류는 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전문가의 의견을 얻었다면,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갖습니다. 최대한 다른 각도에서, 최대한 냉정하게, 스스로 내린 결론을 버무려 자신의 이구심을 최대한 활성화 시키고 그것을 전문가의 의견에 투영해봅시다. 많은 의구심을 극복한 아이디어가 강력한 아이디어입니다
-> 요즘 정말 많이 하는 생각. 스스로 생각하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자기 생각이 없이 남으로부터 주어진 것들을 진리라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속이며 살게 될 것 같다. 뇌는 복잡하지 않은 결론을 좋아하기 떄문에 이건 의식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방금 난 ‘전문가의 의견만을 무조건 신뢰하지는 말라’는 이 명제 또한 의심했어야 했던걸지도)

영어에 존댓말이 없는 까닭

‘가설. 그리고 보니 이 팀은 자신의 가설을 함게 나누는 것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있었다. 가설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다 보면 보다 풍부한 방향으로 아이디어에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대개의 경우 자료를 통해 정보를 모으는 것으로 일을 시작하는데, 정보에 지나치게 집중하게 되면 생각의 더듬이가 그 정보 밖으로 뻗는 것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아이디어가 필요한 일은 아무런 정보 없이 가설로 시작하는 것이 좋고, 정보를 얻은 후에도 새로운 가설을 수렴해보는 것이 좋다. 가설의 타당성이 공감을 얻게 되면 조사를 통해 확인해보면 된다’

고정관념에 대한 고정관념

– 창의적 생각을 위한 방법론들은 고정관념을 버리라고 조언하지만 사실 고정관념을 버리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창의력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도 의문이다. 고정관념은 재해석의 여지도 없고 더 이상 다른 가능성조차 없어 보이는 일종의 ‘생각의 한계점’이다. 즉 그 고정관념을 재해석할 수만 있다면 한계점을 뛰어 넘어 더 높은 수준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가 있는 것이다.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의 예시) 따라서 고정관념을 피해야 할 질병처럼 생각할 게 아니라 극복하기만 하면 보물로 변하는 보물섬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무엇보다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은 다른 많은 정보, 신념들과 섞여 있는 고정관념을 구분해내고 찾아내는 일.

아주머니라는 어머니

‘어떤 정보를 처리할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을 전체라고 단정짓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입체적인 것의 일부분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 추상적인 조언처럼 들리지만 의외로 직관적이다. 3d로 만들어진 공간을 머리 속으로 그려본다고 생각하면 될 것같다. 물론 흩어지는 생각을 구조화 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진주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남득할 수 없는 이야기와 마주친다면 … 이 경우 일단 그의 생각이 옳다고 믿는 마음가짐이 더욱 유효합니다. 미심쩍은 것을 의심하며 이야기를 들으면 그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보다는 옳은 이야기 같은데 이해가 잘 안되니 그의 생각을 하나하나 따라가는 느낌이어야 합니다. 주의 깊게 듣고 자신의 생각을 얹어 질문을 반복해보세요 .. 아이디어를 얻기 바란다면 발명가가 아닌 탐험가가 되어야 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사람이 아니고, 아무데나 버려져 있는 돌멩이 중에서 원석을 골라내 그것을 보석으로 다듬어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쓸 만한 생각을 건지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예전에는 미처 도달하지 못했던 생각의 각도를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의 참석자를 위한 팁

1. 회의 참석하기 전에 바드시 자기의 의견을 가지고 있을 것.
2. 회의 시간은 토론시간이 아니다 –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새겨두세요. 회의 시간은 자신의 신념과 의견을 상대방에게 관철시키는 시간이 아니라 목표 달성 방안, 문제 해결 방안 등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자 검토하고 발전시켜온 생각의 성과를 ‘공유’하는 시간입니다.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는 데 공을 들이다 보면 타인의 의견이 가진 각도의 차이를 간과하기 쉽습니다. i.e 말하는 것보다는 듣는 편이 더 중요합니다. -> 매우 공감하고 이론적으론 알고 있었지만 자주 잊고 있었던 것. 회의를 들어갈 때 내가 할 말만 준비하느라 급급했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버무려 더 나은 생각을 도출해 내려는 노력은 실종되어 있었던 것 같다.

프로세스 디자인

프로세스 중심의 생각이 아니라 생각 중심의 프로세스:
자료가 필요하니 무턱대고 조사를 시작하는 게 아니라 조사하고 분석하기 전에 자유롭고 풍부하게 가설을 세워볼 것. ‘관건은 문제를 찾기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문제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얼마나 다양하게 해보느냐는 것’.

목표, 해결 과제, 해결 방안 -> 프로세스를 가지고 시작하기 전에 이 세가지에 집중할 것. (아직 어떤 일도 진행하기 전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 너무 많은 시간을 상황 파악에 할애할 필요는 없다. 큰 그림을 그린다는 심정으로 하고 정확성은 본격적 프로세스를 시작하면서 추구한다. 생각해 본 가설의 양이 많을 수록 정교해진다.

가뭄에 마른 땅

이슈 = 사실 + 문제 + 결과
-> 컨트롤이 불가능한 ‘사실’과 해결해야 할 ‘문제’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e.g ‘북경반점의 등장으로 우리 매출이 떨어졌다’에서 ‘북경반점의 등장’은 어쩔수 없는 사실인데 이걸 문제로 혼동하는 경우)

런던에 이르는 가장 빠른 방법

‘이봐 김대리. 이해하고 싶다면, 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다면, 진심으로 그를 사랑해보게나. 사랑하는 사람의 눈으로 자네를 돌아보는거야. 자네가 지금 사랑에 실패했다면 그것은 자네가 자네의 눈으로 그 사람을 봤을 뿐 그 사람의 눈으로 자네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네 … 자네의 눈을 버리고 그 사람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나. 나를 극복하고 싶다면 나를 분석하지 말고 이해해야 해. 나를 이해하고 싶다면 나를 사랑해봐.

김상규 – 사물의 이력中

 

pxd 블로그를 뒤지다가 서평을 보고 한국 방문했던 지인을 통해 배달. 주변 일상적인 사물들에 대해 다시 돌아보고 놀라워하는 경험을 가지게 되길 기대하며 시작한 책. 가벼운 마음으로 술술 읽었지만 생각하게 만드는 내용들이 있어서 기록해둔다.

 

1.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발전’은 편리성의 강화와 연관이 되는 경향이 있다. 과정에서 생기는 friction을 최소화하여 최소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하는 방식으로 간다. 기술 발전의 경우 더욱 그렇다. 이 책은 형광등과 필름 카메라 등의 사물을 통해 우리가 말하는 ‘발전/진보’로 인해 사라지는 경험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최근 깊이 생각하고 있던 주제다.
“빛의 형상에도 각각 차이가 있다. 백열등은 둥그런 빛이 확산되는 데 반해 형광등과 네온 불빛은 선을 이루고 있고 LED는 몹시 선명한 점으로 존재한다. LED 조명 아래에서는 빛 공간이 형성되기 어렵다. 즉, 냉정해 보일 뿐 풍부하지는 않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그래서 확산되던 빛의 형상, 달리 표현하면 묵직한 덩어리감이 사라지고 어둠을 밀어내는 원초적인 기능에 충실해진다는 느낌이다. 광원이 전면적으로 바귀는 것은 무엇보다 수십 년간 경험해온 빛의 질감이 삭제되는 것이기도 하다 … 백열전구가 다른 광원으로 대체된다는 것은 ‘어슴푸레하다, 은은하다’라는 식의 표현이 그저 ‘밝다, 환하다’로 바뀌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이제는 전기 소모의 주범으로 지목되어 퇴출되는 백열전구를 대신해서 LED전구가 한결 더 밝게 세상을 비춰줄 것이다 … 하지만 무언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마치 아날로그 음반에서 잡음을 제거한 디지털 음원을 듣는 것처럼 말이다.” (p.19-21)
“때로는 너무 아름다워서, 때로는 차마 그럴 수 없어서 렌즈에 담기를 포기하고 마음에만 남겨둔 것이다. 필름은 기껏해야 36장 밖에 담을 수 없으니 무턱대고 촬영할 수 없다. 여분의 필름을 몇 롤 준비했다고 해도 새 필름으로 갈아 끼우는 사이에 중요한 순간을 놓칠 수 있으니 신중할 수밖에… 필름이 주는 불편함이 신중함을 낳은 셈이다.필름이라면 아끼고 아껴서 중요한 순간을 포착하겠지만 디지털 카메라로는 마냥 찍어댄다. 나중에 지우면 되기 때문에 그다지 신중을 기하지 않는다.”
이 문제의식은 지난번 읽었던 재독학자 한병철 교수의 인터뷰에서 본 ‘제프쿤스의 조각, lg스마트폰, 그리고 브라질리언 왁싱의 공통점’에서 시작된 것인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적인 것, 아날로그적인 것’ 또한 인류역사의 긴 시점에서 놓고 보면 한 시점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워크맨과 삐삐를 추억하는 세대 또한 그로부터 1000년전 조상들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다움’을 상실한 세대로 여겨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물론 글자가 처음 고안되었을 때나 인쇄술이 발명 되었을 때도 이러한 반발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와는 비교할수 없이 빠른 발전의 시대에 살고있음이 분명하다) 발전으로 인해 우리가 잃는 것들에 대한 고민을 결국 ‘인간답다는 것’의 본질은 무엇인가의 고민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사라지는 경험들을 뒤돌아 보는 것이 단순 옛것에 대한 추억팔이인지 혹은 인간됨에 있어 필수적인 것들을 지켜내려는 노력인지에는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디지털 제품을 만드는 디자이너와 기획자들이 사명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편리성과 속도를 극대화시키려는 와중에 맥락이 사라지고, 다소의 불편함이 주는 깊이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선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human-centred design은 과연 정말 인간을 위한 디자인이라고 할수 있는 것인가? ‘현인류는 역사상 유래 없는 기술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더 풍족하게 만들겠다고 출현한 많은 것들이 결국 만든 사람 본인이 재밌어서 일종의 ‘개인적 모험’을 추구한 것의 결과이며, ‘행복의 추구’라는 궁극적 목표에는 별 기여한 바가 없다는 것.

 

2. 또 한가지 흥미로워던 부분은 일상속 사물에 숨어있는 정치성에 대한 언급.
“(t머니에 대해) 사운드와 이미지보다 더 중요한 점은 교통카드를 찍는 행위의 디자인이다. 예컨대 버스를 타는 과정만 떠올려보더라도 이 행위가 몹시 압축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버스 요금을 내는 절차가 교통카드를 찍는 행위로 압축된 것이다 … 이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사람이 사라진 지 오래고 거스름돈으로 옥신각신할 일도 없어졌다 …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절차가 축약되면서 지불 감각도 둔해진 것 같다. 말하자면 번거로움이 사라지는 대신 돈이 빠져나가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티머니가 직불 카드 기능까지 갖추고 있어서 지금의 청소년들은 어른들보다 일찌감치 이러한 경험을 하고 있다. 간편한 지불에 익숙해지는 한편 과정의 경험이 하나씩 삭제된다 … 소비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절차와 연계된 감각이 사라진다는 것도 짚어봐야 할 점인데 그중에는 우리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권리도 포함되어 있다”
‘이케아의 flatpacking은 단순함과 효율성의 미학을 창조했다. 갖가지 방식의 자투리 없애기는 기본적으로 합리적인 관리 원칙을 따른다 .. 합리성이 생산에 투입되는 비용을 낮추기 위한 방편이라는 점은 확실하며, 그 과정에서 가격이 저렴하다는 매력이 두드러지면서 사용자들의 만족감을 높이는 것이다 … 하지만 자투리를 없애는 것에서 시작된 효율성 높은 제품이 자리를 굳히는 사이에 수준 높은 제품을 만날 기회가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있음을 느낀다 … 또한 사무실에 놓이는 사물과 가정에 놓이는 사물에 차이가 거의 없어졌다 … 온갖 종류의 물건이 쏟아지는 오늘날 겉으로는 다양성이 확보된 것 같지만, 사실은 20세기 초에 형성된 표준화의 미덕이 꾸준히 일상 공간을 지배해왔고 사람들은 그 규칙에 익숙해져 있다. 이케아 매장 곳곳에서 이케아 제품으로 꾸며놓은 방은 이러한 표준화를 보여주는 한 풍경이다. 공간의 맥락이 무의미해진 동일화, 즉 공간의 생산라인에서 시작된 치수의 규칙이 아주 사적인 곳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아는만큼 보인다. 집에 굴러다니는 사물에서도 사회와 정치와 철학을 뽑아내는 매의 눈이 부럽다. 그러기 위해선 물론 아는게 많아야겠지만 그에 더해서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익숙함을 낯설게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건 (적어도 내 수준에선) 사색을 요구하는, 상당히 고차원적인 정신의 활동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이런 작업 또한 위에서 말한 ‘사라져가는 경험’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박성현 –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中

 

전체주의자는 ‘사회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개인주의자는 ‘인간은 세상과 영원한 긴장관계에 놓인 존재다’라고 믿는 사람이다. 전체주의자는 인간을 구원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을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개인주의자는 훌륭한 자아, 훌륭한 개인이 되는 것을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전체주의자는 인간을 구원한다는 사회에 관한 이미지를 바꾸는 순간, 전체주의 사상A에서 또 다른 전체주의 사상b로 간편하게 옮겨갈 수 있다. 개인주의자는 ‘개인으로서 사는 것’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한 여전히 개인주의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p.6)

개인이라는 존재는 저절로, 자연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개인은 예외였다. 사람은 오랫동안 떼로 살아왔다. 그래서 우리 유전자 속에는 떼의 본능이 매우 강력하게 똬리 틀고 있다. 훌륭한 떼는 자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훌륭한 자아는 나 자신의 선택과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p.24)

‘자아의 중첩 구조’에 대하여 키에르케고르는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에게 관계시키는 관계’라고 벌렀다. 좀 과장에서 말하면 키에르케고르 사상의 핵심은 이 말 속에 다 들어 있다. 자아는 세상에 대해 ‘긴장 관계를 구성하는 한쪽 극’이기도 하고, 그 긴장관계 자체이기도 하며, 그 긴장관계를 끊임없이 중첩 구조, 복합 구조로 확대해가는 녀석이기도 하다. (p.58)

인간을 구원하는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은 ‘감히 세상 따위가 구원해 낼 수 있는’ 싸구려 존재가 아니다. (p.78)

자유와 권리를 누릴 때가 아니라,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세상과 긴장을 빚을 때 개인, 즉 자아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참된 개인주의의 궁극적 목표는 ‘자유와 권리’가 아니라 ‘진실과 자아’이다. (p.114)

윤리, 도덕 기준,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은 개인의 영혼 밑바닥에서부터-세상과 자아 사이의 긴장에서부터-나와야 한다. 이 긴장이 사라지면 세상이 원하는 것이 선이고, 세상이 미워하는 것이 악이 될 뿐이다. (p.146)

전체주의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아의 죽음-세상과 자아 사이에 긴장이 증발하는 현상-이다. 자아의 죽음이 곧 전체주의를 만들어내는 자중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말하는 선과 악을 의심하는 것-설사 부도덕하다라는 비난을 받더라도 자기 자신의 가치 기준을 세우는 것-이것이 바로 자아의 징표다. (p.147)

자아는 세상과 긴장관계에 놓은 대립물이기도 하고, 이 긴장관계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긴장을 끊임없이 강화하는 것으로 치자면 진실만큼 훌륭한 것이 없다. 진실은 불편하고, 뼈아프고, 거추장스럽기 때문이다. (p.155)

진실이 버거운 까닭은, 진실을 직시하는 순간, 세상-자아 사이의 긴장이 더욱더 강력한 상태로 불거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까닭에 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일 때 자아는 한 단계 성장하게 된다.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관점과 입장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p.156)

‘과거’의 한계, ‘과거’의 구질구질함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것-이것이 바로 과거와 현재 사이의 건강한 긴장이다. (p.211)

‘시간에 관한 예술’은 곧 삶과 생명에 대한 사랑이다. 모든 현재는 곧바로 과거가 된다. 엄격히 말하면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뒤로 무한히 흘러간 과거와, 앞에서 무한히 밀려드는 미래가 우연히 마주친 게이트웨이가 ‘현재’라 불릴 뿐이다. 삶을 사랑하고 긍정한다는 것은 과거를 이해하는 일이다. (p.213)

사실에 대한 관찰에서 출발한, 성실하고 꾸준하고 정직한 진실 추구 과정이 곧 진실이다. 그래서 진실은 요란하지 않다. 무엇인가 사람들이 모여서 고함지르고 시비를 따지며 왁자지껄 소동을 부리는 곳에는 거의 진실이 없다고 생각하면 일단 안전하다. (p.274)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함부로 양심,도덕,정의,진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삶은 진실은 복합적이고 다면적이기 때문이다. (p.291)

꼰대성에 대해

내가 즐겨 찾는 ‘다윗의 서재’에서 발췌.

http://blog.naver.com/gilsamo

 

“‘동방예의지국’은 대한민국의 빛나는 닉네임이다. 어른을 공경하는 건 좋은 전통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미덕이다. 장유유서의 민족적 전통은 어른스럽지 못한 막무가내 식의 꼰대기질까지 아우르는 건 아니다. 젊은이가 어른을 공경해야 하는 당위와 별개로 어른은 젊은이들에게 공경 받을만한 덕과 인품을 갖춰야 한다. 두 입장은 서로 양립하면서 서로를 삼투압으로 피드백해야 한다. 이것이 결락된 어른철학은 교조화된 권력에 빠져 결국 우리 사회를 시끄럽고 추하게 만든다. 생물학적 나이가 어른의 크기를 규정하지 않는다. 어른의 본질은 외재적 숫자가 아닌 내재적 품격에서 발현된다.”

 

“나이가 권력이 된 것은 경험의 두께를 맹신했기 때문이다. ‘내가 오래 살았기 때문에’ 혹은 ‘내가 경험해봐서 아는데’라는 권력화된 감각의 축적률이 모든 진리 인식의 최상단에 놓인다. 그렇기에 경험의 물리력을 수단으로 젊은이를 훈계하고 가르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자기의 경험’으로서 타자마다의 고유한 상황배경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모순을 가진다. 더욱이 경험은 외재적 상황과는 또 다른 개인의 인지.수용.해석 능력의 편차에 따라 각기 다른 밀도로 수렴된다. 나이라는 일차원적 물량만으로는 논증하기 어려운 복잡다단한 부피와 질량의 함수관계를 관통한다는 얘기다.”

 

“나이가 많다는 것에 대한 함정은 철학사적으로 영국의 경험론자들이 가졌던 불편한 오해와 맥을 같이 한다.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을 비판하며 경험에 의한 귀납적 도출을 역설했다. 그러나 베이컨의 경험론은 데카르트에 의해 공박당했다 … 감각과 경험을 중시하는 경험론과 사유와 이성을 절대시한 합리론은 서양철학의 두 뿌리다. 이후 칸트에 의해 두개의 사조가 통합되어 새로운 인식론의 지평을 열기까지 감각(경험)인가 사유(이성)인가의 논쟁은 서양철학사의 뜨거운 토론주제였다… 칸트는 그의 인식론에서 경험을 재료(내용)로 삼되 경험과는 상관없이 타고난 인식능력(형식)을 통해 보편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경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사유는 내용이 없어 공허하고 지성의 능동적 활동에 따른 개념이 없는 경험은 틀과 형식이 없어 맹목적이라는 것이다.”

 

“나이듦에 대한 고매한 통찰은 헤밍웨이를 노벨상으로 이끈 ‘노인과 바다’의 웅숭깊은 주제와도 닿아 있다. 많은 사람이 이 소설의 포인트를 한 노인(인간)의 불굴의 의지와 투혼으로 잡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일면적 감상은 헤밍웨이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 뿐이다. 주인공 산티아고의 진정한 위대함은 물고기와의 죽음을 건 혈투가 끝난 후 별일 없다는듯이 집에 가서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여유있게 커피를 마시는 데 있다. 강렬하고 지독한 삶의 순간순간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 할 수 있는 힘. 그것이 노인 산티아고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결국 정신과 영혼의 고결한 크기야말로 나이듦의 본질이며 숭고한 생명력이다.”

 

“물론 경험은 중요하다. 하지만 경험 못지 않게 사유와 이성도 중요하다. 그리고 겸양과 절제는 나이듦의 궁극이다. 감각에 대한 맹신으로 야기된 교조화된 경험론은 책 한권 읽고 세상을 재단하려는 교만과 동일한 성질의 오류다 … 비트켄슈타인의 말처럼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것이 세상의 진리를 설파하는 보편적 잣대가 되기에는 한없이 작고 미처하다. 나이듦이란 본질적으로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얼마전 교회의 한 청년(나보다 13살이 어린)에게 ‘형이 너보다 조금 더 살았으니까 해주는 말인데’ 하면서 면박을 줬다가 속칭 ‘꼰대’가 된 것 같아 얼굴이 화끈해진 경험을 했다. 장난으로 대충 넘어가는 분위기였지만 몇일 후 그 청년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독일까지 왔고 사실 격려가 많이 필요한 섬세한 친구란 걸 알고 어찌나 스스로가 하찮고 후회가 되던지. 짧은 경험 안에서도 그것을 자신만의 고유한 성찰을 통해 멋스런 통찰력으로 바꾸어내고 또 그걸 살아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오랜기간 축적된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유의 틀로 정제시키지 않았거나 혹은 타성에 젖어 있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꼰대가 되는건 정말 한순간이다. 강자 앞에선 숙이고 약자 앞에선 강한, 비겁하고 과시하길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 두렵다.

나이가 조금 들고나니
잘 모르는 것 앞에선 침묵할 수 있는게 참 용기고 멋인 것 같다. 그리고 참 달변가는 적게 말하되 많이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것. 깊이 사유하고 삶으로 체화시키지 않았다면 입을 다무는게 일단 유익한 것 같다. 설령 살아낸 경험이라 해도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한마디인지 스스로 정직할 필요가 있다. 꼰대가 되는건 한순간, 나이는 상관없다. 상대적 약자 앞에서 나를 증명하려는 비겁함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