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말

KakaoTalk_Photo_2017-07-25-17-52-36_64.jpeg

… 플레너리 오코너는 이런 종교적인 전통이 강한 곳에서 이런 뻔한 말들 그리고 이런 위선적인 말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 저는 문학의 정신중에 매우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뻔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뻔한 말이란 것은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만들어주죠. 합의된 어떤 말들입니다. 그정도 말을 하면 되는거죠. 서로 상처받지 않고 별 의미 없는 말들을 하는 것인데, 이런 뻔한 말들은 너무나 넓게 사용되니까 아무것도 지칭하지 않을 때가 많아요. 정확하지 않은 말이죠. 적확하지도 않고. 예를 들면 어른들이 매일 하는 말 있잖아요. ‘아유, 자식있는 부모있나.’ ‘인생 뭐 있어’ 이런 말들이 뻔한 말이고. 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이에요. 그런데 작가들은 이런 뻔한 말을 피하는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뻔한 말이 담지 못하는 진실들, 뻔한 말이 포착하지 못하는 인간의 심리와 상황, 이런 것들을 아주 예리하게 파악하는 것입니다. 어떤 작가들은 완전히 새로운 언어, 새로운 문체를 창안하기도 하고, 어떤 작가는 플레너리 오코너처럼, 아주 흔하게 쓰여지는 뻔한 말들을 다른 맥락에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플래너리 오코너’편),

난 여럿이 함께 써주는 생일카드에 짤막한 메세지 하나를 써줄 때도 뻔한 말을 쓰는 걸 싫어해서 머리를 열심히 굴리곤 한다. 뻔한 말을 쓰는 건 어쩐지 게으르다고 느껴진다. 거기에 진심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얼굴을 맞대고 있을 때 서먹서먹한 우리들에게 글을 통해서 평상시 고마웠던 점이나 상대에 대해 좋게 봤던 부분들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는 소중하니까, 어떻게든 마음을 전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반대로 누군가로부터 카드를 받을 때도 (물론 카드를 준비해서 써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많이 고맙겠지만) 뻔한 말들을 읽으면 약간의 실망을 느끼곤한다. 이런 뻔한 말은 (플래너리 오코너가 그랬듯) 교회 공동체에서 더 자주 보인다. ~을 소망한다던지, ~기도할게 라던지 혹은 주안에서~합니다 같은 말들은 이상하게 날 허탈하게 만든다. 무엇에서든지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의 유별남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모든것을 ‘소설가적 특성’으로 포장할 수 있단 사실에 정체모를 뿌듯함을 느낀다.

Advertisements

위로

KakaoTalk_Photo_2017-07-04-11-46-24_51.jpeg

이 책을 읽으면서 혼란스러웠던 부분은, 원래 내 취향이 이동진과 잘 맞았던 건 분명한데 빨간책방을 애청한지 1년이 조금 넘은 지금 형성된 나의 취향이 어느 정도까지 이동진화 되어있는 것인지의 부분. 시작하자마자 쓱 읽어내려간 이 책에서 독서에 대한, 예술에 대한 그의 생각에 거의 비판의 여지가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렀다. 가볍게 읽은 탓도 있겠지만 만약 나도 모르게 동화된 것이라면 비평가란 족속들은 참으로 무서운 자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책에서 말한 ‘허무는 독서’보단 ‘쌓는 독서’에 가까웠는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겐 일종의 위로가 되었던 독서 경험이었다. 여러차례 글로 표현했듯 책장이란 내게 있어 현실과 이상의 괴리 자체, ‘reading debt’에서 자유하기가 쉽지 않은 나였기에 본인의 ‘지적 허영심’과 화목한 상태에 있어 보이는 저자의 독서론은 – 예를들면 완독에 대한 강박이라던가 좋은 독서에 대한 그의 생각 –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문학을 읽는 것이 ‘길을 잃어버림’을 위한 것이며 책을 읽는 이유는 그저 ‘책이 거기 있기 때문에’라는 문장은 김영하의 ‘읽다’의 내용과 거의 완전히 같아서 흥미로웠고, ‘(재미를 유지하기 위해)한번에 열권 읽기’라던가 좋은 책을 고르기 위해선 (특히 논픽션의 경우) 목차를 활용하고 저자의 호흡이 딸리는 2/3지점을 살피라는 방법론, 그리고 좋은 비평에 이르고 싶다면 책을 요약하는 연습부터 시작하라는 이야기 등은 당장 적용해 보고 싶은 내용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고독한 경험이지만 그 경험은 감미롭습니다. 게다가 책을 읽을 때 그 고독은 사실 다른 고독과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자 한 자 책을 쓰는 저자의 고독과 한 줄 한 줄 책을 읽는 독자의 고독 사이 … 그 작은 평화 속에 위엄이 있고 위안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연대를 꿈꿉니다.” (p.5)

” ‘있어 보이고’ 싶다는 것은 자신에게 ‘있지 않다’라는 걸 전제하고 있습니다. ‘있는 것’이 아니라 ‘있지 않은 것’을 보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허영이죠. 저는 지금이 허영조차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정신의 깊이와 부피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래서 영화든 음악이든 책이든 즐기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빈 부분을 메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적 허영심일 거에요.” (p.17)

“(문학을 왜 읽어야 하나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간접 경험보다는 직접적인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죠. 그런데 직접적인 경험보다 간접적인 경험이 더핵심을 보게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 특히 소설을 통한 간접적인 체험으로 삶의 문제를 더욱 예리하게 생각할 계기를 갖게 됩니다 … 미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미국에 관한 책을 읽는게 아니라는 거죠. 미국에 직접 가보고도 알 수 없는 것들을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거죠.” (p.30)

“저는 책 읽는 중간중간에 잠시 멈추는 것, 그것도 독서 행위이고, 더 나아가서 그것이 좋은 독서라고 생각합니다 …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들은 대부분 오래 걸리는 시간 자체가 그 핵심입니다 … 독서를 할 때 우리가 선택한 것은 바로 그 책을 읽고 있는 그 긴 시간인 것입니다. (p.57)

“좋은 독서를 위해서는 책을 읽는 자체가 아니라 책을 읽음으로써 나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 그것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독서에서 정말 흥미로운 순간은, 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마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책을 읽을 때 책과 나 사이 어디인가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p.80)

북클럽을 시작하며 정기적인 공구의 기회가 생겼고 킨들을 사용하기까지 하면서 안그래도 부담이 되던 reading debt가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 올라선 상황에서 여러모로 내게 적절한 책이 찾아온 것 같다. 저자 또한 ‘책이 나를 억누르는’ 지금의 나와 같은 시기를 겪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런데 세상에 좋은 책은 너무 많고 앞으로 더 많아 질 것임은 분명하니 그렇다면 그저 자유하고 즐기기를 택한 것이겠지. (저자가 말한 ‘아님 말고’의 자세가 바로 그 핵심이다) 나보다 훨씬 심각한 애서가가 먼저 걸어가 본 길을 가볍게 흝으며 가진 자기모순과의 화해의 시간이었다.

March 29

벌여 놓은 일들이 많아 몸은 바쁜데 그중 뭐 하나 내 뜻대로 흘러가질 않으니 한가하고 태평했던 과거의 기억들로 희귀하게 된다. 새로운 만남들은 언제나 반갑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지 반복해서 설명해줘야 하는 데서 오는 피로감도 함께 쌓인다. 처음엔 그런 과정들을 통해 내 생각을 다시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지금은 몇년 전에서 정체 되어 있는 내 사유와 고민의 수준에 민망함을 느낄 뿐이다. 나로 하여금 경외감을 느끼게 하고 존재 자체로 압도하는 그런 불편한 만남을 찾아다니던 때가 있었다. 이젠 배움이고 뭐고 그냥 편한 사람들이 더 좋다. 쓸데없이 항상 진지해 보이는 내 속의 장난꾸러기를 끄집어내 보일 수 있는 그런 상스럽고 교양 떨어지는 만남도 가끔은 필요하다.

시선

Screen Shot 2017-04-29 at 08.38.43

공공장소에서 마주치는 어린아이들은 종종 나로 하여금 경외를 느끼게 한다. 천진한 어린 아이에겐 생면부지한 사람의 눈을 한참동안 직시할 수 있는 슈퍼파워가 있다. 난 대체적으로 보고도 새침하게 모른척하다가 이따끔 그 눈싸움에 응해줄 때가 있는데 이 싸움의 승자였던 적은 거의 없다. 오랜기간 거절감과 두려움을 배우고 타인은 지옥이라고 학습한 어른은 순전한 호기심으로 무장한 시선 앞에서 마치 벌거벗은 듯 당혹감을 먼저 느낀다. 남의 눈에 어떻게 비춰지는지를 많이 의식하는 나는 사람의 눈을 바라보고 대화하는 걸 훈련으로 익혔다. 지금도 의식하지 않으면 벽이나 바닥 및 각종 인테리어 제품들과 대화를 하게 되는데 이건 대화상대와의 친밀도와 큰 상관관계가 없단 것도 알게 됐다. 처음 만났는데도 마치 날 감싸주는 듯한 따쓰한 눈빛이 있는가 하면 오래 봤음에도 그때마다 내가 면밀히 읽히고 있다는 느낌을 줘서 슬쩍 피하게 되는 관찰자의 눈동자도 있다

KakaoTalk_Photo_2017-04-28-22-39-50_22

이 날을 매우 또렷히 기억한다.
친구들이 모두 바쁘기도 했지만 왠지 혼자 있는 것도 운치있을 것 같아서 집앞의 비싼 한식당에 가 회덮밥에 미역국, 맥주를 한파인트 시켜 먹었다. 기분 내겠다고 팁도 많이 줬다. 30이란 숫자가 나에게 툭 던져진 듯한 기분이었는데 딱히 멜랑콜리하다거나 그런 건 없었다. 싱겁지만 그냥 맥주 때문에 약간 멍했던게 전부였다. 난 그렇게 30이 되었고 그때 마음이 글에서 여전히 느껴진다는 건 조금 놀랍고 기분 좋은 일이다.

Screen Shot 2017-04-28 at 22.21.23

대체 이때 무슨 생각이었던걸까. 미쳤던 게 틀림 없다. 베를린에서 2년반동안 난 무리했고 그래서 아팠다. 아플 때마다 글을 썼고 이제와 그 글들은 내 손 발의 온 마디에 또 다른 종류의 아픔을 안겨 주고 있다. 5월 북클럽 준비를 위해 정말 읽어야 할 책이 여기 있었다.

저때 참 사랑타령을 많이 했는데. 굴레에서 벗어나기 까지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다. 말하자면 탈영에 성공했다. 사랑탈영.

인스타그램

인스타그램을 시작한지가 얼추 4개월정도 된 듯 싶다.

오래동안 거들떠보지도 않던 걸 시작한 이유는 친구들의 대부분이 거기 있어서였다.
SNS는 결국 주변 사람들의 소식을 받고 전하는 용도니까. 황량해진 페이스북에서 계속 기웃거리는 건 더이상 내게 있어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난 기본적으로 사진을 많이 찍는 사람이 아니다. 딱히 잘 찍는 편도 아니고 하물며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종류의 시크하고 이쁜 그런 사진은 더더욱.

그러고보니 근래에 들어서 내게 SNS는 내 생각을 표출하기 위한 창구로 더 많이 사용되어 왔던 것 같다. 인스타그램에서도 똑같이 한다. (그래서 성의 없게 사진을 툭 던져놓고 장문의 글을 쓰는 나를 신기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뭔가 난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같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이따끔 친구들의 계정에 들어가 보면 어떻게하면 그런 사진을 찍을 수 있는지 진심으로 경이롭다. 필시 누구에게나 삶이 항상 그렇게 시크하고 이쁘고 맨질맨질한 것은 아닐탠데 인스타그램에서 그런 생각은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장문의 글이나 깊은 속마음을 꺼내는 일 같은 것들도 별 가치가 없다. (물론 가끔 내 꾸질꾸질한 생각을 수고스럽게 읽어주는 친절한 사람들도 있다) 인스타그램 위의 삶은 그저 쿨하고 미니멀리스틱하며 남들에게 보여질 만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고 그걸 딱히 비판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난 그냥 거기 있으면 왠지 모르게 좀 답답하다. 그냥 좀 더 날것의 나를 꺼내 놓고 싶다. 그래서 먹은 음식이나 볼거리를 내놓았던 게 갑자기 뭔가 겸연쩍어서 모두 지웠다.

누가 굳이 읽어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쿨하지 않다. 누가 읽어줬으면 좋겠고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다면 좀 슬플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내가 아직 살아있다고, 존재한다고 알려주고 싶고 확인 받고 싶어서 계속 뭔가를 끄적이고 있는 이런 자기모순을 매번 마주해야하는 게 아프고 슬프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