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책을 읽는가 – Charles Dantzig

“우리는 지식을 얻기 위해 역사 회고록이나 정치 프로그램 등을 보기도 하지만 사실 지식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지식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 그래서 단순히 지식을 채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유추능력’이다. 문학 중에서도 특히 픽션은 유추의 형태를 띈다 .. 지성을 넘어 감성에 반응하는 유추를 통해 사물을 이해한 것이 바로 문학이다.”

“함께 말하고 토론하며 싸우기도 하지만, 이치를 따지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는 동지가 된다. 나의 반대자는 나의 형제이다.”

“좋은 독자는 읽으면서 쓴다. 인쇄업자가 남긴 모든 틈새를 이용해서 동그라미를 치고, 밑줄을 그으며 자신의 느낌을 적는다 … 좋은 독자는 문신을 그리는 예술가이다. 책속의 야생성을 조금이라도 자기 그림으로 만들어낸다

“책은 독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저자를 위한 것도 아니다. 책은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책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독자를 위해 만든 책은 독자를 소비자로 간주하고 무언가 의도를 품는다. 그 의도가 누군가를 즐겁게 하려는 것이든, 설득하려는 것이든 그런 책은 친절해진다”

“독서가는 일반적인 믿음과 달리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독서는 누군가의 독백을 듣는 것이며 일종의 대화에 해당한다. 대화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화려한 독백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는 행위이자 상대방의 인내심을 요구하는 행위이다. 평소 멍하게 마비되어 있는, 얼핏 수동적으로도 보이는 우리의 사고는 독서를 할 때 드디어 시동이 걸리기 시작한다. 감수성과 기억력이 맞물린 메커니즘에 의해 활성화된 사고는 온몸을 전율케 만드는 문장들을 만나게 된다. 바로 그 순간 우리 온몸 구석구석에 문학의 향기가 퍼진다.”

“독서는 그 어느 것에도 봉사하지 않는다. 그래서 독서가 위대한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나아갈 때 나는 죽음과 경주를 한다. 이는 다른 모든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왜냐하면 독서의 본질적인 동기이자 유일한 이유, 그것은 바로 죽음과 당당히 결투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과의 결투를 지지하며 앞에서 이끄는 용사들은 바로 작가들이다 … 우리는 항상 실패했지만 결코 굴복하지는 않았다. 작가와 독자는 한 팀이 되어 실패를 향해 나아간다. 왜냐하면 승리는 항상 죽음에게 있기 때문이다.”


 

2년전쯤 읽었다가 메모를 해뒀던 책.

독서를 ‘불멸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투쟁’으로 정의한 샤를 단치의 독서 애찬론에 완전히 마음이 동하진 않았다. 그건 지나치게 거창하다.  허나 한권의 책을 ‘어떤 정보를 뽑아 내야하는 대상’이라 여기는, 내 몸에 배어 있는 태도와의 끊임 없는 싸움이 시작 되었던 게 아마 이 책을 읽고 나서가 아니었나 싶다.

독서 하는 행위를 작가와 독자의 관계적 측면에서 바라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을 초월하여 이루어지고 또 계속 되는 관계라는 관점도 흥미로웠다.

다만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작가들이 계속 언급되었고, 또 저자의 독서 내공이 너무 깊다보니 상당수 예로 든 독서의 동기나 상황들이 공감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초중반부 이후부터는 띄엄띄엄 읽었고 리듬을 잃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

욕망해도 괜찮아

내가 가끔 친구들에게 우스갯 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10년전 쯤 참석한 한 파티에서 친구들이랑 춤을 추다가 일생일대의 수치와 모욕감을 느낀 적이 있었는데 – 믿을지 모르겠지만 그때 어떤 여자애랑 춤 배틀(?)같은 걸 했다는 지금 생각하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 – 그때 이후로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겨버려서 그런 자리들이 불편하고 춤추는 게 어색하다는 이야기.

집에 와서 곰곰히 생각해 보니 반은 맞고 반은 아니었다 (새삼 느끼는건데 자기점검이 없으면 이렇게 스스로 속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어제 손님들을 제법 초대한 송년회를 가지다가 다들 흔드는 분위기에 나만 계속 뺄 수가 없어서 정말 오랜만에 춤 비슷한 걸 흉내냈는데, 딱 봐도 뻣뻣한 모양새로 무아지경 춤을 추는 사람들을 보며 사실 마음 한편으로 부러웠던 것 같다. 베이스가 쿵쾅 거리는 그 순간에도 나는 내가 우스꽝스러워 보이진 않을까 되뇌이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런 취향이 없다고 애초에 선을 그어 놓으면 편리하긴한데 사실 주변 시선이 신경쓰이는 것 뿐이다.

내가 생각해도 난 좀 awkward한 면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잘 정돈된 언어의 사용을 좋아해서 만남 후에는 내가 오늘 뱉어낸 말들을 복기하며 흐뭇해하기도, 좌절할 때도 많다 (물론 후자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주변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를 표출하면서도 남들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재능들이 종종 부럽다. 이런 사람들은 주변의 awkward함까지 통째로 껴안아 품어버린다.

2016 후반기 내 고민의 연장선상으로 2017의 나는 내 안의 욕망들과 좀 더 화목해졌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바라고 원하는 것들을 모두 꺼내보일 수는 없는거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 아니라고 선긋고 점잖은 척 하진 말아야지. 주위 시선은 조금 덜 신경쓰고, 겉과 속이 지금보다 조금 더 일치 했으면 한다. 그게 더 건강한 것 같다.

여섯 시간 남았네. 어쨌든 ‘올해는 더욱 더 철들지 말자’고 했던 연초의 다짐은 꽤나 잘 지킨 것 같아서 뿌듯하다. 크윽..

지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 낙관하라

브렉시트의 충격이 전세계를 휩쓸 당시 난 베를린에 있었는데 며칠 후 ‘솔직히 지금 독일에서 투표해도 같은 결과가 나올 거야’라고 말했던 독일 친구가 생각난다. 독일도 똑같고 정도의 차이일 뿐 다문화/다인종 국가에 가면 어디든 비슷한 상황일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브렉시트/트럼프당선은 미디어가 대표하는 코스모폴리탄한 대도시들 중심의 주류권문화와 비교적 소외된 지역 (혹은 계층)들간에 격차를 수면 위로 드러낸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앞으로도 나와 내 친구들은 ‘믿을 수 없어!’라는 반응들을 보고 들으며 몇년을 보낼거다. 우리 주변엔 비슷한 사람들 밖에 없으니까. 모두가 동등한 1표를 가진 대의민주제에서 ‘다수’라고 믿었던 자들은 ‘소수’였던 것이고, 결과적 ‘소수’의 사회적 영향력이 얼마나 크던 간에 국가는 그 1표가 모여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중 과반수가 현상황이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결과다. 그리고 그들 없이는 나도 지금과 같은 삶은 영위할 수 없다.

그러니까, 내가 자라오고 익숙한 커뮤니티만이 세상의 전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좀 역설적이지만 어떤 의미에선 우물한 개구리였던 거다. ‘무식하고 배타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사람들에 의해 이 나라와 전세계가 망조가 들어간다, 라는 피해의식이나 상대적 우월감에서 빨리 벗어나야한다. 지금 캐나다 이민 웹사이트 서버가 다운 되었다고 하는데, 시민사회는 수십년, 수백년간 자유와 평등을 위해 고뇌해 왔고 영국이 EU를 탈퇴하고 트럼프가 당선 된다고 해서 갑자기 모든 종류의 차별이 합리화 될 만큼 허약하지 않다. 안타까운 결과지만, 체제를 허물겠다고 공약한 이들로 인해 다소 진통을 겪으면서 더 다양한 방향성과 사상들이 드러나 경쟁하고 결국엔 전부 잘 될 거라고 (믿고 싶다).

out of breath

 

모든걸 말로 표현하려다보면 진부해지고 구차해져 결국 멋이 없어질 때가 종종 있다. 침묵과 여백이 차지해야 할 공간을 나의 불완전한 단어들로 빼곡히 채우려다가 호흡곤란이 오는 그런 기분. 우리의 매순간이 시의 언어처럼 온전하길 바라는 건 어디까지나 그저 바램에 불과하겠지만, 어쩌면 매우 간헐적으로나마 그게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믿게 되는 때가 있다. 절제, 압축 된 언어로 사유뿐만 아니라 마음의 온기까지 오롯이 담아내는 사람들, 그들은 소통에 있어서 경제성이나 효율성을 추구했다기보단 그저 시간의 힘을 믿는것처럼 보였다. 불완전한 언어의 힘으로 지금 이순간 마음을 움직이려 애쓰기보단 과장치 않고 담백하게 순간을 그저 담아낼 수 있는 그런 마음의 넓이, 를 나의 빈곤한 어휘로 굳이 표현하자면 그건 ‘용기’에 가까울거다. 난 언제쯤 더 적게 말하여 더 많이 담아낼 수 있을지. 언제나 뒤돌아볼 때쯤이면 내가 뱉어낸 말들 앞에서 한없이 초라하다.

Just Do It

연말까지 일을 안하는 대신 혼자 뭔가를 만들어 보겠다며 살고 있다. 나이 30, 남들은 한참 커리어 쌓고 있을 시점에 어찌보면 참 사치스런 시간인데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나름의 의미가 있다. 자기주도적인 시간으로 뭔가를 만들어보겠다는 계획을 제대로 실행해본 성공경험이 부족하다고 항상 느껴왔기 때문.

서두에 이런 글을 쓰면 어떤 소기의 성과를 친구들에게 알리기 위한 글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서두는 단지 페이크였을 뿐 어제 나는 간만에 영걸전이라는 게임을 즐겼다. 할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는데 참으로 미친짓이 아닐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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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걸전은 어떤 게임인가, 이번 대학 새내기가 태어나기도 전 1995년에 발매된 도스게임으로서, 나에게 586컴퓨터와 영걸전은 같은 의미라고 할수 있다. (이 글을 읽으며 도스가 뭐고 586이 뭔지에서 막히신 분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세요ㅜㅜ) 처음으로 가지게 된 586컴퓨터에 영걸전이 깔려 있었기 때문. Hero.com으로 실행이 가능했다. 그때 세틀러2와 어떤 괴악스런 토끼가 총을 쏴대는 게임도 함께 인스톨되어 있었는데 하여튼..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게임이기도 하다. 특히 2장막판에 장판파에서 백성달고 피난해야하는 스테이지는 눈물 없이는 플레이가 힘들다. 그야말로 안구정화 게임…

어쨌든, 그저께 저녁에 시작해서 새벽 3시까지 하다가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오늘 새벽 2시까지 연달아 게임을 했다. 시계를 한 두번쯤 본 듯. 약 24시간동안 게임을 하면서 한끼 먹었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여기서부터 약간 의아할탠데, 일단 나에겐 약간의 저혈압 증세가 있어서 끼니를 거르면 손부터 떨고 정상적인 생활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즘 허리랑 목이 아프고 랩톱으로 문서작업을 하도 해서 손가락 근육도 몇개 오작동 중인데 이걸 24시간동안 한번도 느끼질 못했다. 페이스북, 카톡, 이메일, 웹툰.. 하루에 적어도 한두번이상은 체크하는 것들이 전혀 생각도 안났다. 즉 꼬박 1.5일은 안먹고 안자고 게임을 했다는건데,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되겠지만 난 여기서 크나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정말 집중을 하게되면 주변 환경적인 요소는 정말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 말한 몸이 불편하다던지 배가 고프다던지 하는 문제들 외에도 내게는 작업을 할때 일정 수준 이상의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을 때가 많은데 시간활용을 효율적으로/영리하게 하려다가 결과적으로 이도저도 아닌 상황이 종종 발생하는거다. (예를들면 앞에서 했던 일과 연결시켜서 흐름을 가져가려 한다던지 혹은 머리가 찌뿌둥하기 때문에 효율이 안나오니 밖에 나가서 환기를 시킨다던지 등등..) 실재로 45분 작업- 15분 휴식 같은 방법론은 너무도 유명하다. 근데 지금 내게 드는 생각은, 우리가 소히 말하는 ‘the zone’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저런 방법론을 필요로 하게 된 건 아닌가, 이 말이다.

그렇다면 고민해볼 수 있는 문제는, 영걸전의 무엇이 그렇게 특별했는가 하는 사실이다. 두가지 정도를 생각해볼 수 있었는데.

1. 영걸전의 중요한 요소는 스토리텔링이다. 내가 아주 익숙하고 즐겨봤고 지금도 그러한 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의 스토리에 나를 던지는 경험 자체가 몰입을 가능케한다.
2.더 중요한 요소는, 게임에는 분명한 엔딩이 있고 유져는 그 엔딩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직시한다. 현실에선 아무리 분명하고 quantify할 수있는 목표를 세운다고해도 거기엔 불확실성이 따르고 일정 수준의 모호함이 있지만 여기선 다르다. 중간 과정에서 경험하는 실패도 분명한 ‘끝’을 향한 과정의 일부로 쉽게 치환된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인간을 산만하게 만든다는 문제의식을 꽤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나다. 실재로 스마트폰을 위시한 많은 최신 기술의 경우 사람의 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컨트롤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determinist적인 입장도 있다. (흥미로운건, 이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지극히 지협적인 고민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 예로 소크라테스는 문자의 발명이 인간을 바보로 만들 것이라고 반대했다는데 문자 또한 인간의 뇌를 어떤 식으로든 변화시켰을 것이고 이건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 한 연구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은가?) 여기서 빠저나와보려고 지난 몇달간 폰없이도 살아봤지만 gadget의 부제가 즉각적인 몰입과 깊이로 이어지진 않았다. 이런 주제에 대한 책은 시중에도 여러권 나와 있지만 그걸 몸으로 느끼고 체화시키는 것은 분명 경험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어제의 경험은 신선했고 나름의 격려가 되었다(?). 깊이로의 길, 몰입의 능력이 내 안에 분명 살아있다는 반증이다. 몸으로 생생히 느낀 어제를 가능한 기억해내고 싶어서 쓴 글..

우리 기억 속의 색 – 미셸 파스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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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 돌아온지 일주일이 지나 이 글을 쓰는데 내가 책을 다 읽었던 게 한국방문 중이었으니 아마 네달정도가 지났을게다.

책 첫장에 꾹꾹 눌러 쓴 메모가 먼저 눈에 띈다.

‘너무나 흥미로운 주제.
이 책을 통해 내삶 속 알록달록한
기억들이 되살아나길 기대하며.
영권이 런던오는 길에 부탁.
Sep 2015
(책디자인이 정말 맘에든다)’

책 디자인에 대해 좀더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보통 시간이 지나면 띄지가 걸리적거려 버리기 마련인데 이 책의 경우엔 띄지가 책을 완성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심플한 흰색 바탕의 책 커버 위에 띄지를 씌우면 마치 흰 캔버스에 색을 칠한 듯한 모양이 되는 것이다. (덧붙여 한국에서 몇몇 지인에게 이 책을 선물하며 띄지가 몇가지 다른 종류로 나왔다는 것 또한 발견했다.) 또 타이포그라피의 느낌이 아주 좋았는데 프랑스 작가가 ‘색’이란 주제에 대해 논한 책이라는, 일종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전체적 독서 경험에 일부로서 훌륭히 기능했다고 생각한다. 적당히 진지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이 있었고 디자이너가 분명 이 책을 읽고 디자인 했을 것이란 생각이들게 한다. 또 잘 눈에 띄지는 않지만 보통 책장 윗면이나 하단부에 위치하는 breadsrumb이 책장 안쪽에 있었는데, 사용성 측면에서 있어서는 살짝 의문이 붙지만 예상외의 경험으로 독자를 웃음짓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책을 절반쯤 읽은 후에야 발견한 디테일이었기 때문이다. 색덕후인 작가가 한국판의 디자인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수 없지만 아마 꽤 흡족해 하지 않았을까.

본론으로 돌아와, 엇그제 김영하 작가의 ‘읽다’를 통해 소설을 읽는 행위 자체에 대해 생각해 봤다면 오늘 이 산문집을 통해 산문을 읽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넉달이 지나 지금 생각해보니 이 책은 나에게 어떤 ‘이미지’로 남아있다. 색의 역사에 관해 몇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을 배우긴 했지만 (얘를들어 초록색이 흉흉한 색으로 생각 되었던건 초록색 코스튬을 입은 연극배우들이 종종 의문의 죽음을 당했기 때문인데 이건 당시 염색 기술의 한계로 인해 초록색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독성 물질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라던지..) 그 이상의 무엇은 아닌것 같다. 아마도 색에 대한 새로운 지식들을 배우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산문은 어떻게 읽어야하나.
‘이야기 속에서 헤메는’ 경험 자체가 소설 읽기의 목적인 것처럼 산문에서도 굳이 무언가 얻으려 할 필요는 없다. 난 오늘 오랜만에 이 책을 다시 펼치면서 흥미로운 경험을 했는데 저자가 쓴 산문이 마치 ‘우리가 카페에 마주보고 앉아 커피 한잔을 두고 나누는 삶’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에세이 한편을 다시 읽었는데 뭔가 말로 표현하긴 힘들지만 새로운 느낌이 있었다. 지인과 커피 한잔두고 나누는 대화에서 모든 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진 않는다. 하지만 어디서 집중해야 하고 끄덕여 공감을 표시해야 하는지는 느낌으로 안다. 모든 종류의 책을 작가와의 ‘대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치면 산문은 그중에서도 커피/차한잔 놓고 나누는 대화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소설이 나를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에서 완전한 ‘몰입’의 경험을 준다면 산문은 작가 앞에 앉아 있는 나를 여전히 인식하고 있는 상태에 가깝다. 피천득 선생이 수필에 대해 예찬한 글처럼 거기엔 소설과는 다른 일종의 ‘공간’이 있다.

퀄리티 있는 대화, 뭔가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는 대화를 찾는 요즘이다. 독서를 좀더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경험으로 만들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과 훈련이 필요한 요즘이다.

그런 의미에서 dog-ear 해둔 페이지들을 복기하는 건 일단 뒤로 미뤄두고, 이 책은 조금 뒀다가 다시 읽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