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 Do It

연말까지 일을 안하는 대신 혼자 뭔가를 만들어 보겠다며 살고 있다. 나이 30, 남들은 한참 커리어 쌓고 있을 시점에 어찌보면 참 사치스런 시간인데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나름의 의미가 있다. 자기주도적인 시간으로 뭔가를 만들어보겠다는 계획을 제대로 실행해본 성공경험이 부족하다고 항상 느껴왔기 때문.

서두에 이런 글을 쓰면 어떤 소기의 성과를 친구들에게 알리기 위한 글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서두는 단지 페이크였을 뿐 어제 나는 간만에 영걸전이라는 게임을 즐겼다. 할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는데 참으로 미친짓이 아닐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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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걸전은 어떤 게임인가, 이번 대학 새내기가 태어나기도 전 1995년에 발매된 도스게임으로서, 나에게 586컴퓨터와 영걸전은 같은 의미라고 할수 있다. (이 글을 읽으며 도스가 뭐고 586이 뭔지에서 막히신 분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세요ㅜㅜ) 처음으로 가지게 된 586컴퓨터에 영걸전이 깔려 있었기 때문. Hero.com으로 실행이 가능했다. 그때 세틀러2와 어떤 괴악스런 토끼가 총을 쏴대는 게임도 함께 인스톨되어 있었는데 하여튼..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게임이기도 하다. 특히 2장막판에 장판파에서 백성달고 피난해야하는 스테이지는 눈물 없이는 플레이가 힘들다. 그야말로 안구정화 게임…

어쨌든, 그저께 저녁에 시작해서 새벽 3시까지 하다가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오늘 새벽 2시까지 연달아 게임을 했다. 시계를 한 두번쯤 본 듯. 약 24시간동안 게임을 하면서 한끼 먹었다.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여기서부터 약간 의아할탠데, 일단 나에겐 약간의 저혈압 증세가 있어서 끼니를 거르면 손부터 떨고 정상적인 생활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즘 허리랑 목이 아프고 랩톱으로 문서작업을 하도 해서 손가락 근육도 몇개 오작동 중인데 이걸 24시간동안 한번도 느끼질 못했다. 페이스북, 카톡, 이메일, 웹툰.. 하루에 적어도 한두번이상은 체크하는 것들이 전혀 생각도 안났다. 즉 꼬박 1.5일은 안먹고 안자고 게임을 했다는건데,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되겠지만 난 여기서 크나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정말 집중을 하게되면 주변 환경적인 요소는 정말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 말한 몸이 불편하다던지 배가 고프다던지 하는 문제들 외에도 내게는 작업을 할때 일정 수준 이상의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을 때가 많은데 시간활용을 효율적으로/영리하게 하려다가 결과적으로 이도저도 아닌 상황이 종종 발생하는거다. (예를들면 앞에서 했던 일과 연결시켜서 흐름을 가져가려 한다던지 혹은 머리가 찌뿌둥하기 때문에 효율이 안나오니 밖에 나가서 환기를 시킨다던지 등등..) 실재로 45분 작업- 15분 휴식 같은 방법론은 너무도 유명하다. 근데 지금 내게 드는 생각은, 우리가 소히 말하는 ‘the zone’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저런 방법론을 필요로 하게 된 건 아닌가, 이 말이다.

그렇다면 고민해볼 수 있는 문제는, 영걸전의 무엇이 그렇게 특별했는가 하는 사실이다. 두가지 정도를 생각해볼 수 있었는데.

1. 영걸전의 중요한 요소는 스토리텔링이다. 내가 아주 익숙하고 즐겨봤고 지금도 그러한 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의 스토리에 나를 던지는 경험 자체가 몰입을 가능케한다.
2.더 중요한 요소는, 게임에는 분명한 엔딩이 있고 유져는 그 엔딩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직시한다. 현실에선 아무리 분명하고 quantify할 수있는 목표를 세운다고해도 거기엔 불확실성이 따르고 일정 수준의 모호함이 있지만 여기선 다르다. 중간 과정에서 경험하는 실패도 분명한 ‘끝’을 향한 과정의 일부로 쉽게 치환된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인간을 산만하게 만든다는 문제의식을 꽤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나다. 실재로 스마트폰을 위시한 많은 최신 기술의 경우 사람의 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컨트롤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determinist적인 입장도 있다. (흥미로운건, 이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지극히 지협적인 고민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 예로 소크라테스는 문자의 발명이 인간을 바보로 만들 것이라고 반대했다는데 문자 또한 인간의 뇌를 어떤 식으로든 변화시켰을 것이고 이건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 한 연구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은가?) 여기서 빠저나와보려고 지난 몇달간 폰없이도 살아봤지만 gadget의 부제가 즉각적인 몰입과 깊이로 이어지진 않았다. 이런 주제에 대한 책은 시중에도 여러권 나와 있지만 그걸 몸으로 느끼고 체화시키는 것은 분명 경험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어제의 경험은 신선했고 나름의 격려가 되었다(?). 깊이로의 길, 몰입의 능력이 내 안에 분명 살아있다는 반증이다. 몸으로 생생히 느낀 어제를 가능한 기억해내고 싶어서 쓴 글..

우리 기억 속의 색 – 미셸 파스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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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 돌아온지 일주일이 지나 이 글을 쓰는데 내가 책을 다 읽었던 게 한국방문 중이었으니 아마 네달정도가 지났을게다.

책 첫장에 꾹꾹 눌러 쓴 메모가 먼저 눈에 띈다.

‘너무나 흥미로운 주제.
이 책을 통해 내삶 속 알록달록한
기억들이 되살아나길 기대하며.
영권이 런던오는 길에 부탁.
Sep 2015
(책디자인이 정말 맘에든다)’

책 디자인에 대해 좀더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보통 시간이 지나면 띄지가 걸리적거려 버리기 마련인데 이 책의 경우엔 띄지가 책을 완성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심플한 흰색 바탕의 책 커버 위에 띄지를 씌우면 마치 흰 캔버스에 색을 칠한 듯한 모양이 되는 것이다. (덧붙여 한국에서 몇몇 지인에게 이 책을 선물하며 띄지가 몇가지 다른 종류로 나왔다는 것 또한 발견했다.) 또 타이포그라피의 느낌이 아주 좋았는데 프랑스 작가가 ‘색’이란 주제에 대해 논한 책이라는, 일종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전체적 독서 경험에 일부로서 훌륭히 기능했다고 생각한다. 적당히 진지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이 있었고 디자이너가 분명 이 책을 읽고 디자인 했을 것이란 생각이들게 한다. 또 잘 눈에 띄지는 않지만 보통 책장 윗면이나 하단부에 위치하는 breadsrumb이 책장 안쪽에 있었는데, 사용성 측면에서 있어서는 살짝 의문이 붙지만 예상외의 경험으로 독자를 웃음짓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책을 절반쯤 읽은 후에야 발견한 디테일이었기 때문이다. 색덕후인 작가가 한국판의 디자인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수 없지만 아마 꽤 흡족해 하지 않았을까.

본론으로 돌아와, 엇그제 김영하 작가의 ‘읽다’를 통해 소설을 읽는 행위 자체에 대해 생각해 봤다면 오늘 이 산문집을 통해 산문을 읽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넉달이 지나 지금 생각해보니 이 책은 나에게 어떤 ‘이미지’로 남아있다. 색의 역사에 관해 몇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을 배우긴 했지만 (얘를들어 초록색이 흉흉한 색으로 생각 되었던건 초록색 코스튬을 입은 연극배우들이 종종 의문의 죽음을 당했기 때문인데 이건 당시 염색 기술의 한계로 인해 초록색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독성 물질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라던지..) 그 이상의 무엇은 아닌것 같다. 아마도 색에 대한 새로운 지식들을 배우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산문은 어떻게 읽어야하나.
‘이야기 속에서 헤메는’ 경험 자체가 소설 읽기의 목적인 것처럼 산문에서도 굳이 무언가 얻으려 할 필요는 없다. 난 오늘 오랜만에 이 책을 다시 펼치면서 흥미로운 경험을 했는데 저자가 쓴 산문이 마치 ‘우리가 카페에 마주보고 앉아 커피 한잔을 두고 나누는 삶’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에세이 한편을 다시 읽었는데 뭔가 말로 표현하긴 힘들지만 새로운 느낌이 있었다. 지인과 커피 한잔두고 나누는 대화에서 모든 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진 않는다. 하지만 어디서 집중해야 하고 끄덕여 공감을 표시해야 하는지는 느낌으로 안다. 모든 종류의 책을 작가와의 ‘대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치면 산문은 그중에서도 커피/차한잔 놓고 나누는 대화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소설이 나를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에서 완전한 ‘몰입’의 경험을 준다면 산문은 작가 앞에 앉아 있는 나를 여전히 인식하고 있는 상태에 가깝다. 피천득 선생이 수필에 대해 예찬한 글처럼 거기엔 소설과는 다른 일종의 ‘공간’이 있다.

퀄리티 있는 대화, 뭔가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는 대화를 찾는 요즘이다. 독서를 좀더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경험으로 만들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과 훈련이 필요한 요즘이다.

그런 의미에서 dog-ear 해둔 페이지들을 복기하는 건 일단 뒤로 미뤄두고, 이 책은 조금 뒀다가 다시 읽는 걸로.

김영하의 ‘읽다’

몇달전을 기점으로 나에게 일어난 기분좋은 변화의 ,말하자면, 시작을 알린 책.
이 책을 읽은지 얼마 되지 않아 독일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소년이 온다’를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읽었고, ‘빨간 책방’ 포드캐스트가 눈에 들어왔고 (그것은 아마 항상 사정권에 있었지만 내가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리라), 본격적으로 소설에 빠져들었다.

소설에 빠진 것은 단순히 다른 장르의 책을 읽기 시작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밑에 quote에서 필자가 말했듯이 무의미해 보이는 것, 비효율, 비생산을 향해 마음을 여는 것이고 그에 따르는 불안감으로부터 의식적으로 자유하는 것이다.

‘그러니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주제나 교훈을 얻기 위함도 아니고, ‘감춰진 중심부’ (소설과 타 문학의 차이)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도 아닙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분명히 어떤 교훈을 얻은 것 같기도 하고, 주제를 찾아낸 것 같기도 하고, ‘중심부’를 열심히 찾아 헤매다 얼추 비슷한 곳에 당도한 것도 같은데, 막상 다 읽고 나면 그게 아니었단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소설을 읽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헤매기 위해서일 겁니다. 분명한 목표라는 게 실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이상한 세계에서 어슬렁거리기 위해서입니다. 소설은 세심하게 설계된 정신의 미로입니다. 그것은 성으로 향하는 K의 여정과 닮았습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성’)저멀리 어슴푸레 보이는 성을 향해 길을 따라 걸어가지만 우리는 쉽게 그 성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대신 낯선 인물들을 만나고 어이없는 일을 겪습니다.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을 경험하기도 하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를 곰곰히 짚어보기도 합니다 … 작가가 써놓은 문장에 탄복하기도 하고, 예리한 인물 묘사에 공감하기도 하고, 주인공이 처한 고난에 가슴 아파하기도 합니다 … 때로 이성에 이끌렸다가 때로 감성에 이끌렸다가 하면서 우리의 정신은 책 속에 구현된 그 이상한 세계를 점차 이해해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세계의 일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좋은 독서란 한 편의 소설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작가가 만들어 놓은 정신의 미로에서 기분좋게 헤매는 경험입니다.’

‘누군가는 물을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소중하다. 그런 귀중한 시간을 들여 소설을 읽는다면 뭔가 얻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마 플로베르라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 그 아까운 시간을 들여 고작 바람피우면죽는다 같은 교훈이나 얻는다면 그거야말로 시간의 낭비다.’ 우리는 화폐경제에서 살아기가 때문에 교환이 불가능한 것들은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 일상이라는 무미건조한 세계 위에 독서와 같은 정신적 경험들이 차곡차곡 겹을 이루며 쌓이면서 개개인마다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 현대의 기업들은 우리를 빅데이터의 한 점으로 봅니다. 우리의 개성은 몰각되고 행위만이 의미 있습니다. 우리가 더이상 물건을 사지 않고, 인터넷에 접속하지도 않으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몰개성적 존재로 환원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안에 나만의 작은 우주를 건설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 그것들이 조용히 우리 안에서 빛날 때, 우리는 인간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세계와 맞설 존엄성과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소설이 이렇게 엄연한 자연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면, 독자는 이 자연을 어떻게 인식하고 경험하는 것일까요? 독자들은 이런 책들과 어떤 투쟁을 벌이는 것이며, 그런 도전의 결실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제가 ‘롤리타’나 ‘죄와 벌’, ‘이방인’ 같은 작품을 읽으며 무수히 떠올린 질문들이었습니다. 이런 소설들을 읽는 것은 정신적으로 높은 수준의 긴장을 요구합니다. 윤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주인공과 그들의 행위를 받아들이는 것도 어렵고,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감당하는 것도 힘겹습니다 … 바로 이순간 밀란 쿤데라가 ‘소설은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이라고 정의한, 바로 그 의미를 실감하게 됩니다 … 그러니 독자는 작가와 일종의 합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소설을 다 읽을 때까지 일단 도덕적 판단은 유보하겠다’라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 그러나 그 윤리적 판결과 별개로 작품의 매력이라는 다른 차원이 존재합니다. 주인공이 치료가 필요한 변태성욕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롤리타’가 쓰레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의 매력은 우리로 하여금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우리는 뫼르소와 험버트 험버트, 하스콜니코프와 정신적 힘겨루기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도덕하거나 사회적 통념과는 벗어난 행동을 하는 인물의 이야기에 나는 왜 매력을 느끼는가? 나는 괴물인가? 혹시 나는 너무 어두운 심연을 지나치게 오래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평범하고 도덕적인 삶은 사는 내가 이런 이야기에 매혹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 … 그렇다고해서 그 책을 읽는 우리의 자아가 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책들을 읽고 다면 독자의 자아는 읽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런 인물과 사상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 위대한 작품들은 자아의 일부를 대가로 지불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 등산가는 높은 산을 오르면서 더욱 경험이 풍부하고 강해집니다. 때로 극심한 고통을 겪기도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다시 산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들이 풍부한 경험을 쌓고 강해지기 위해 산에 가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들은 산에서 겪는 경험을 사랑할 뿐입니다.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왜 산을 오르냐는 질문에 ‘거기 산이 있으니까’로 답했는데요. 이 단순한 답이 지금까지 희자되는 것은 그것이 산에 오르는 사람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기 때문일 겁니다 … ‘자, 근육량을 늘리고 건강해지기 위해 헬스클럽에 가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간과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소설을 읽자’라고 결심하는 것은 어딘가 부자연스럽습니다 … 독자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그 어떤 분명한 유익도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소설을 읽은 사람으로 변할 뿐입니다.’

생각하는 늑대 타스케

경영 혹은 생각의 수련법에 관련된 책들에는 크게 흥미가 없는 편인데 (소스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신뢰가 갔던)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되어 지난 5월 한국 체류중 구입한 책.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생각의 습관을 훈련하기 위한 방법론을 제시함에 있어 소설이란 형식을 취했다는 점이다. 필자가 소설의 포맷을 채택한 이유는 아마 기존의 뻔한 포맷을 탈피하여 읽는 이의 몰입을 돕기 위해서 일것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일기 형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술술 읽혔던 책이었는데 광고인이라는 필자의 필력도 상당했다. 아마도 책의 궁극적 목적인 방법론 제시를 위해 핵심 bullet points를 먼저 정하고 거기에 맞게 이야기를 구성하지 않았을까 짐작되는데 억지스러운 느낌이 별로 없었다.

늑대 타스케가 제시하는 방법의 핵심은 책중 정차장에 의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듯 ‘더 깊은 생각’. ‘뭔가 다른 생각’을 방해하는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말라는 것 (편견, 상식, 법칙, 프로세스, 고정관념…etc)

전문가의 함정

‘전문가의 의견을 취하면서도 생각의 스취치를 끄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직접 만나든 책에서 읽든) 전문가의 의견을 구하기 전에 나름대로의 결론을 먼저 내려두는 것이 좋습니다. 스스로 내린 결론을 가지고 있으면 적어도 전문가의 의견을 아무 여과 없이 그대로 흡수하는 오류는 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전문가의 의견을 얻었다면,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갖습니다. 최대한 다른 각도에서, 최대한 냉정하게, 스스로 내린 결론을 버무려 자신의 이구심을 최대한 활성화 시키고 그것을 전문가의 의견에 투영해봅시다. 많은 의구심을 극복한 아이디어가 강력한 아이디어입니다
-> 요즘 정말 많이 하는 생각. 스스로 생각하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자기 생각이 없이 남으로부터 주어진 것들을 진리라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속이며 살게 될 것 같다. 뇌는 복잡하지 않은 결론을 좋아하기 떄문에 이건 의식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방금 난 ‘전문가의 의견만을 무조건 신뢰하지는 말라’는 이 명제 또한 의심했어야 했던걸지도)

영어에 존댓말이 없는 까닭

‘가설. 그리고 보니 이 팀은 자신의 가설을 함게 나누는 것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있었다. 가설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다 보면 보다 풍부한 방향으로 아이디어에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대개의 경우 자료를 통해 정보를 모으는 것으로 일을 시작하는데, 정보에 지나치게 집중하게 되면 생각의 더듬이가 그 정보 밖으로 뻗는 것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아이디어가 필요한 일은 아무런 정보 없이 가설로 시작하는 것이 좋고, 정보를 얻은 후에도 새로운 가설을 수렴해보는 것이 좋다. 가설의 타당성이 공감을 얻게 되면 조사를 통해 확인해보면 된다’

고정관념에 대한 고정관념

– 창의적 생각을 위한 방법론들은 고정관념을 버리라고 조언하지만 사실 고정관념을 버리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창의력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도 의문이다. 고정관념은 재해석의 여지도 없고 더 이상 다른 가능성조차 없어 보이는 일종의 ‘생각의 한계점’이다. 즉 그 고정관념을 재해석할 수만 있다면 한계점을 뛰어 넘어 더 높은 수준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가 있는 것이다.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의 예시) 따라서 고정관념을 피해야 할 질병처럼 생각할 게 아니라 극복하기만 하면 보물로 변하는 보물섬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무엇보다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은 다른 많은 정보, 신념들과 섞여 있는 고정관념을 구분해내고 찾아내는 일.

아주머니라는 어머니

‘어떤 정보를 처리할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을 전체라고 단정짓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입체적인 것의 일부분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 추상적인 조언처럼 들리지만 의외로 직관적이다. 3d로 만들어진 공간을 머리 속으로 그려본다고 생각하면 될 것같다. 물론 흩어지는 생각을 구조화 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진주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남득할 수 없는 이야기와 마주친다면 … 이 경우 일단 그의 생각이 옳다고 믿는 마음가짐이 더욱 유효합니다. 미심쩍은 것을 의심하며 이야기를 들으면 그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보다는 옳은 이야기 같은데 이해가 잘 안되니 그의 생각을 하나하나 따라가는 느낌이어야 합니다. 주의 깊게 듣고 자신의 생각을 얹어 질문을 반복해보세요 .. 아이디어를 얻기 바란다면 발명가가 아닌 탐험가가 되어야 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사람이 아니고, 아무데나 버려져 있는 돌멩이 중에서 원석을 골라내 그것을 보석으로 다듬어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쓸 만한 생각을 건지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예전에는 미처 도달하지 못했던 생각의 각도를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의 참석자를 위한 팁

1. 회의 참석하기 전에 바드시 자기의 의견을 가지고 있을 것.
2. 회의 시간은 토론시간이 아니다 –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새겨두세요. 회의 시간은 자신의 신념과 의견을 상대방에게 관철시키는 시간이 아니라 목표 달성 방안, 문제 해결 방안 등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자 검토하고 발전시켜온 생각의 성과를 ‘공유’하는 시간입니다.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는 데 공을 들이다 보면 타인의 의견이 가진 각도의 차이를 간과하기 쉽습니다. i.e 말하는 것보다는 듣는 편이 더 중요합니다. -> 매우 공감하고 이론적으론 알고 있었지만 자주 잊고 있었던 것. 회의를 들어갈 때 내가 할 말만 준비하느라 급급했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버무려 더 나은 생각을 도출해 내려는 노력은 실종되어 있었던 것 같다.

프로세스 디자인

프로세스 중심의 생각이 아니라 생각 중심의 프로세스:
자료가 필요하니 무턱대고 조사를 시작하는 게 아니라 조사하고 분석하기 전에 자유롭고 풍부하게 가설을 세워볼 것. ‘관건은 문제를 찾기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문제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얼마나 다양하게 해보느냐는 것’.

목표, 해결 과제, 해결 방안 -> 프로세스를 가지고 시작하기 전에 이 세가지에 집중할 것. (아직 어떤 일도 진행하기 전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 너무 많은 시간을 상황 파악에 할애할 필요는 없다. 큰 그림을 그린다는 심정으로 하고 정확성은 본격적 프로세스를 시작하면서 추구한다. 생각해 본 가설의 양이 많을 수록 정교해진다.

가뭄에 마른 땅

이슈 = 사실 + 문제 + 결과
-> 컨트롤이 불가능한 ‘사실’과 해결해야 할 ‘문제’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e.g ‘북경반점의 등장으로 우리 매출이 떨어졌다’에서 ‘북경반점의 등장’은 어쩔수 없는 사실인데 이걸 문제로 혼동하는 경우)

런던에 이르는 가장 빠른 방법

‘이봐 김대리. 이해하고 싶다면, 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다면, 진심으로 그를 사랑해보게나. 사랑하는 사람의 눈으로 자네를 돌아보는거야. 자네가 지금 사랑에 실패했다면 그것은 자네가 자네의 눈으로 그 사람을 봤을 뿐 그 사람의 눈으로 자네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네 … 자네의 눈을 버리고 그 사람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나. 나를 극복하고 싶다면 나를 분석하지 말고 이해해야 해. 나를 이해하고 싶다면 나를 사랑해봐.

스키니진

스키니진을 처음 입었던게 아마 2006년. 요즘 가끔 다리가 저린다. 10주년을 맞아 더 나은 혈액순환을 위해 좀 베기한 바지들을 찾던중 난 Cos에서 기가막힌 아이템을 발견한다. 그것은 허벅지부분은 헐렁하고 밑으로 가면서 서서히 줄어드는 항아리형의 짙은 회색 바지였는데 제질은 언뜻보기엔 츄리닝같기도 하지만 얇은 정장바지 같기도 한, 여하튼 내가 찾던 그런 아방가르드의 느낌이었다… 10년만의 베기팬츠가 선사한 경험은 인크레더블했다. 바람이 불때마다 바지가 미세하게 펄럭이며 몸에 닿는 그런 기분은 몸과 하나로 밀착된 스키니진은 절대 줄 수 없었던, 마치 자연인이 된 듯한 그런 느낌이라고 하면 이건 좀 오버인가.ㅋㅋ (예전에 어떤 책에서도 읽었던 것 같은데 의복이 달라지면 걸음걸이도 변한다고하니 의복과 사람마음은 이처럼 묘하게 닿아있는 것이다)

나이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힘을 빼는 작업을 하게 된다. 금빛 장식이 달린 자홍색 벨벳 자켓에 흰색 칼구두, 땡땡이 나비넥타이를 일상복처럼 입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과장된 연출로 어깨에 힘 주기보단 자연스럽고 편한 것을 추구하게 된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인연을 만들고 싶다면 잔뜩 몰입해서 내 힘으로 만들어가려던 때가 있었다면 이젠 흐르는대로,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다면 아쉬운건 그대로 조금 내비두기도 해보고, 한마디 툭 던지고 싶다가도 한번 참아보고, 시간의 힘을 믿어보고, 그런다. 생각해보면 스키진을 처음 입으면서 10년후쯤 내가 이루었을거라고 막연히 상상했던 그 어떤것들도 난 이루진 못한것 같지만 그래도 지금 나 괜찮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것 같다고. 베기팬츠를 입어보며 느낀 더이상 막연하지 않았던 긍정.

소년이 온다

한동안 잊고 지냈었는데
우리집엔 그날의 참혹함을 증언하는 책자가 하나 있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시신들을 적나라하게 기록해둔 책. 어린 마음에 화들짝 놀라 되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 꼭꼭 숨겨뒀었다. 돌이켜보니, 소년은 그렇게 한번 내게 왔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난 참 많이 울었다.
슬픔도 연민도 아닌 마치 그저 답답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라서, 책을 읽으며 몸이 아픈 듯한 경험을 한건 처음이었다. 이 책을 시작하고 끝마친 베를린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난 맨정신이기가 힘들어 위스키가 필요했을 정도였으니까.

한국에 있는동안 뭣도 모르고 몇몇분께 이 책을 선물하고 다녔다. 쉽게 권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너라면 어떤 선택을 했겠냐고, 직접 보진 못했지만 증인이 되어줄 수 있겠느냐고, 이런 질문의 무게를 느끼게 되어서 그렇다.

공감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부질없게 느껴져 그저 숙연해지는 때가 있다. 놀라운 경험을 선물한 한강 작가에게 박수를, 그리고 여전히 살아감 그 자체로 증언하고 있는 소년들에게 마음다해 응원을 보내며…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갈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묵묵히 쌀알을 씹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삶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 지난 오년 동안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

‘나무 그늘이 햇빛을 가리는 것을 너는 싫어했제. 조그만 것이 힘도 시고 고집도 시어서, 힘껏 내 손목을 밝은 쪽으로 끌었제. 숱이 적도 가늘디가는 머리카락 속까장 땀이 나서 반짝반짝 함스로. 아픈 것맨이로 쌕쌕 숨을 몰아쉼스로.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 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Brexit

브렉시트 찬/반 결정을 이민자 이슈에 대한 영국인들의 인식으로 해석하는 언론이 많은데 여기서 발생할 수 있는 큰 오류는 찬성파들을 모두 인종차별주의자 취급해선 안된다는 점은 차치하고, *반대파 또한 모두 pro-immigration이 아니라는 점이다.* 반대파 또한 브렉시트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중심으로 캠페인을 펼쳤고 많은 이들이 이민자에 대한 인식과는 별개로 자신들에게 닥칠 현실적 어려움을 이유로 반대표를 던졌을 것이다. 나와 같은 편이라고 싸잡아 동질화 시키고 미화시키려는 경향은 위험하다. 현실을 보자. 각자가 바라는 이상적 국가의 모습이 전부 다르다.

 

댓글란에서 Disillusion이란 표현을 자주보인다. 정확하다. 영국은 브렉시트를 통해 이기주의적 성향의 사회가 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런 사회였던거다. 52%가 찬성표를 던졌고, 내 주변 지인들은 대부분 런던근처에 있으니 수치를 조금 조정한다고 해도 어림잡아 3-4명중 하나는 브렉시트를 찬성했단 말이 아닌가. 그만큼 자국민들이 나라에 대해 몰랐다는 반증이다. 이를 통해 내가 속해있는 사회 일부분을 통해서만 느꼈던 ‘우리 나라’에 대한 이미지가 무너진 것이고 어떤 의미에선 난 이것은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 결과로 인해 기성세대에 의해 ‘미래를 빼앗겼다’라고 느끼는 젊은이들과 무슨 이유에서든 탈퇴를 댁한 기성세대 그 사이의 깊은 골이 생길 것이 자명해 보이는데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브렉시트 최대의 피혜중 하나다. 독일이라고 다를까? 프랑스는 어떤가? 지난 몇년간 조금이라도 뉴스를 본 사람이라면 유럽의 우경화 경향에 대해 모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영국의 경우 카메론이 희대의 뻘짓을 벌이는 바람에 그것이 수면위로 떠오른 것뿐.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인 독일의 속내는 무엇인가? 그들이 영국보다 이민자에 대해 관대하고 인도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좋은 나라라고 믿는 나이브함은 대체 어디서 온것인가?

 

브렉시트 이후 ‘EU가 뭔가요’라는 검색어가 급증했다던가 많은 사람들이 후회하고 있다는 언론의 보도 또한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고 벌써 70만명이 서명했다는 재투표는 말그대로 넌센스다. 이제는 바뀐 나라에서 어떻게하면 내가 원하는 사회의 모습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지 고민해야하는 때다. 인종/국가를 뛰어 넘어 ‘사람’으로 이뤄진 커뮤니티를 건설하겠다는 이상은 벽에 부딪혔고 유럽은 이를 극복하기 보다는 희귀하고 말았다. 브렉시트는 그래서 슬픈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