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버스 안에서

설레임이 짜증으로 바뀌는 것도 한순간.
뒤에 있는 남자는 버스 출발하자마자 미친듯이 코를 골기 시작했고
옆에 여자는 랩톱을 꺼내어 드라마를 보고 있다.
낯선 이와 나 사이에 암묵적으로 침범하지 말아야 할 거리/반경이 사람마다 다르단걸 느낀다. 가령 팔꿈치가 살짝만 닿아도 흠칫하는 나에 반해 옆좌석의 여자는 마치 내가 옆에 없단 듯이 행동한다.
무더운 여름 감옥에선 다른 수감자들이 또다른 36.5도 짜리 열덩이로 밖에 느껴지질 않아서 슬프다고, 그래서 겨울이 더 좋다고 한 신영복 선생님 글이 문득 생각났다
모두 프랑크푸르트로 향한다는 것 외에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굳이 알 필요도 없는 사람들. 오늘 처음 만나 적어도 내 관점에선 내게 여러모로 민폐를 끼치고 있는 중인 이 사람들을 더불어 사는 세상이란 이유로 어디까지 이해해야 하는 걸까. 
나 빼고 다 잘 자고 있는 것 같다.
주말 여행, 시간 좀 아껴보겠다고 굳이 탄 새벽버스 안에서. a.m 1:50

갈수록

갈수록 픽션이 안읽혀지고 시간낭비처럼 느껴지는건 큰 문제다. (잘 만들어진 영화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상은 떠먹여준다. 수동적으로 느끼고 체험하면 된다. 반면 훨씬 깊고 긴 호흡의 서사를 전달하는 소설에선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능동적으로 텍스트를 해석하고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할 부지런함이 없어서다

고독

이제는 우리를 외로운 채로 내버려두어야 한다. 친구를 만나고 싶은 마음 그대로 놔두기도 해야 한다. 친구가 내 앞에 있을 때보다 없을 때 더 잘 보이기 때문이다. 타인과 함께 있을 때보다 외로울 때 나를 더 잘 볼수 있고, 나와 대화할 수 있고, 나와 화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집착하지 않으면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고독의 방 하나를 얻게 될 것이다.

<묵상의 여정> p.277

참을 수 없는 빈 여백의 어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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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드는데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90년대 후반부터 모든 음악에서 간주라는게 사라졌어요. 다들 세상사는게 너무 급해져서 간주가 나오면 라디오 체널이 돌아가버리는거에요. 그러니까 1절이 끝나면 바로 2절이 들어가게 되더라고. 그러니까 지금 모든 가요에 간주가 없죠.’

이방인

그래 맞다 이방인은

그가 저기서 왔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에게까지 넓혀지지 않았을때 생겨나는 단어인거다.

[출처] 이방인(異邦人)|작성자 두번째 걸음

베를린에 가서야 난 내가 이방인임을 느꼈다. 돌이켜보면 인생의 반을 한국에서, 나머지 반을 영국에서 보냈지만 소히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는 많은 이들과는 다르게 딱히 내가 이방인이라고 느낀 적은 많지는 않았던것 같다. 그건 아마 이 사회가 나를 이방인으로 규정하고 튕겨내려 하는 그 치열한 접점까지 나를 넓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모든것이 편해진 이 곳에서 이방인도 아니고 정착민도 아닌 상태로 내 울타리 안에서 자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는 씁쓸한 깨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