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어구라는 말

 

관용어구(idiom)란게 참 흥미로운 단어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가 쓰는 거의 모든 단어와 표현에 있어서 우리는 그 단어의 뿌리/기원등을 알지 못하고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아이고 내가 너때문에 못살아!’ 라던지 (정말 삶의 의지를 잃었단 의미로 저 표현을 쓰는 사람은 없다) 그 외에도 넓게보면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기 위해 조합중인 모든 단어가 이 범주에 들어간다. 즉, 어쩌면 일상의 언어 자체가 관용어구들의 집합이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관용어구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이러니인 샘이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이해된/내재된 어떤 개념을 언어란 틀을 사용해서 표현한다. 단어를 말로 뱉어 낸 순간 그 본래의 온전했던 의미는 일부 상실된다. 내 마음을 오롯히 담아낼 수 있는 완벽한 언어는 없을거다. 사랑의 마음을 언어로 표현할때 느끼는 답답함이 적절한 예시중 하나 일것이다.

관용어구와 다를 바 없는 단어들의 조합이 불완전한 또 하나의 이유는 언어는 언제나 -심지어 같은 언어를 사용할지라도- 특정 문화내의 구조적 영향하에 있기 때문에 각사람마다 같은 단어 같은 표현을 이해함에 있어 미세한 차이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거이다. 하물며 다른 언어를 사용하거나 다른 문화권에서 오래 거주한 경험을 가진 두 사람이라면..?

그렇기에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고 마음이 전해진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이렇듯 불완전한 언어를 재료로 사용하여 글을 쓰는 것에 있어 최고의 예술적 경지가 있다. 비유라던지, 언어의 파괴라던지, 시같은 것들이 여기에 들어간다. (문학적/문화적 affordance에 의존하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표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클리셰를 배제하려 애쓴 그런 글들이 가끔 있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예술적 실험 혹은 자기만족을 위한 유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가 다른 인간에게 이해되고, 감동을 주고, 새로운 생각의 지평을 열어준다면 이는 더더욱 위대한 일이다. 그리고 내 경험상, 많은 경우 작가조차 의도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이런 기적이 일어난다. 글이 삶과 부딪칠때 일어나는 놀라운 화학반응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딪치지 않고 편하게 읽히는 글은 그 가치가 적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제만날지 모르는 글과의 부딪침에 언제나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어느 독서 구입 애호가의 생존전략

 

책을 사서 10%밖에 못 읽을 나라면 책을 10권사자

그럼 한권은 읽을거다

대신 10권 값을 투자 할 책 한권을 고르면 된다(10권을 모두 10%씩만 읽을수 있단건 함정)

그런데 양서 한권을 고르는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추천을 받거나 미디어의 호평을 받아 산 책에 실망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이럴땐 과감하게 집어 던지는게 유익하다
흔히 우리는 책을 쓰는 행위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있어서 책을 쓴 사람이면 당연히 똑똑한 사람이라고 짐작할 때가 많은데 그건 사실이 아닐뿐더러 비판적 독서를 가로막는 허들이 될수 있다. 내게 있어 이건 충격적인 발견이었다. 어떤 저자들은 집에서 놀고 먹는 나와 당신보다 멍청하다. 혹은 굉장히 똑똑하지만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는 책도 있다
결론적으로. 책을 많이 사자. 10권사면 1권은 건진다…

새벽 버스 안에서

설레임이 짜증으로 바뀌는 것도 한순간.
뒤에 있는 남자는 버스 출발하자마자 미친듯이 코를 골기 시작했고
옆에 여자는 랩톱을 꺼내어 드라마를 보고 있다.
낯선 이와 나 사이에 암묵적으로 침범하지 말아야 할 거리/반경이 사람마다 다르단걸 느낀다. 가령 팔꿈치가 살짝만 닿아도 흠칫하는 나에 반해 옆좌석의 여자는 마치 내가 옆에 없단 듯이 행동한다.
무더운 여름 감옥에선 다른 수감자들이 또다른 36.5도 짜리 열덩이로 밖에 느껴지질 않아서 슬프다고, 그래서 겨울이 더 좋다고 한 신영복 선생님 글이 문득 생각났다
모두 프랑크푸르트로 향한다는 것 외에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굳이 알 필요도 없는 사람들. 오늘 처음 만나 적어도 내 관점에선 내게 여러모로 민폐를 끼치고 있는 중인 이 사람들을 더불어 사는 세상이란 이유로 어디까지 이해해야 하는 걸까. 
나 빼고 다 잘 자고 있는 것 같다.
주말 여행, 시간 좀 아껴보겠다고 굳이 탄 새벽버스 안에서. a.m 1:50

갈수록

갈수록 픽션이 안읽혀지고 시간낭비처럼 느껴지는건 큰 문제다. (잘 만들어진 영화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상은 떠먹여준다. 수동적으로 느끼고 체험하면 된다. 반면 훨씬 깊고 긴 호흡의 서사를 전달하는 소설에선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능동적으로 텍스트를 해석하고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할 부지런함이 없어서다

고독

이제는 우리를 외로운 채로 내버려두어야 한다. 친구를 만나고 싶은 마음 그대로 놔두기도 해야 한다. 친구가 내 앞에 있을 때보다 없을 때 더 잘 보이기 때문이다. 타인과 함께 있을 때보다 외로울 때 나를 더 잘 볼수 있고, 나와 대화할 수 있고, 나와 화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집착하지 않으면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고독의 방 하나를 얻게 될 것이다.

<묵상의 여정> p.277

참을 수 없는 빈 여백의 어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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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드는데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90년대 후반부터 모든 음악에서 간주라는게 사라졌어요. 다들 세상사는게 너무 급해져서 간주가 나오면 라디오 체널이 돌아가버리는거에요. 그러니까 1절이 끝나면 바로 2절이 들어가게 되더라고. 그러니까 지금 모든 가요에 간주가 없죠.’

이방인

그래 맞다 이방인은

그가 저기서 왔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에게까지 넓혀지지 않았을때 생겨나는 단어인거다.

[출처] 이방인(異邦人)|작성자 두번째 걸음

베를린에 가서야 난 내가 이방인임을 느꼈다. 돌이켜보면 인생의 반을 한국에서, 나머지 반을 영국에서 보냈지만 소히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는 많은 이들과는 다르게 딱히 내가 이방인이라고 느낀 적은 많지는 않았던것 같다. 그건 아마 이 사회가 나를 이방인으로 규정하고 튕겨내려 하는 그 치열한 접점까지 나를 넓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모든것이 편해진 이 곳에서 이방인도 아니고 정착민도 아닌 상태로 내 울타리 안에서 자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는 씁쓸한 깨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