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멍 ‘나는 학생이다’ 中

“나에게는 희망과 소망이 있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맑고 밝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맑고 밝다’를 의미하는 명랑(明朗)이란 무슨 뜻인가? 한 사람의 성공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 그의 처지는 순조로울 수도 있고, 역경에 처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떠나 마음이 평안하고, 홀가분하고 상쾌하며, 티 없이 맑고 떳떳하며, 건강하고 즐거울 수는 없는 것일까?”
“이런 생각의 끄트머리에서 나는 정말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학생이었다! 내가 일생 동안 학생의 신분이었다는 이 깨달음은 대단히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렇다! 나는 학생일 뿐이었다 ….. 일상생활에서도 모든 사람들을 스승으로 모셨고, 곳곳에 나의 교실이 있었고, 시시각각 언제나 학기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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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규 – 사물의 이력中

 

pxd 블로그를 뒤지다가 서평을 보고 한국 방문했던 지인을 통해 배달. 주변 일상적인 사물들에 대해 다시 돌아보고 놀라워하는 경험을 가지게 되길 기대하며 시작한 책. 가벼운 마음으로 술술 읽었지만 생각하게 만드는 내용들이 있어서 기록해둔다.

 

1.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발전’은 편리성의 강화와 연관이 되는 경향이 있다. 과정에서 생기는 friction을 최소화하여 최소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하는 방식으로 간다. 기술 발전의 경우 더욱 그렇다. 이 책은 형광등과 필름 카메라 등의 사물을 통해 우리가 말하는 ‘발전/진보’로 인해 사라지는 경험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최근 깊이 생각하고 있던 주제다.
“빛의 형상에도 각각 차이가 있다. 백열등은 둥그런 빛이 확산되는 데 반해 형광등과 네온 불빛은 선을 이루고 있고 LED는 몹시 선명한 점으로 존재한다. LED 조명 아래에서는 빛 공간이 형성되기 어렵다. 즉, 냉정해 보일 뿐 풍부하지는 않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그래서 확산되던 빛의 형상, 달리 표현하면 묵직한 덩어리감이 사라지고 어둠을 밀어내는 원초적인 기능에 충실해진다는 느낌이다. 광원이 전면적으로 바귀는 것은 무엇보다 수십 년간 경험해온 빛의 질감이 삭제되는 것이기도 하다 … 백열전구가 다른 광원으로 대체된다는 것은 ‘어슴푸레하다, 은은하다’라는 식의 표현이 그저 ‘밝다, 환하다’로 바뀌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이제는 전기 소모의 주범으로 지목되어 퇴출되는 백열전구를 대신해서 LED전구가 한결 더 밝게 세상을 비춰줄 것이다 … 하지만 무언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마치 아날로그 음반에서 잡음을 제거한 디지털 음원을 듣는 것처럼 말이다.” (p.19-21)
“때로는 너무 아름다워서, 때로는 차마 그럴 수 없어서 렌즈에 담기를 포기하고 마음에만 남겨둔 것이다. 필름은 기껏해야 36장 밖에 담을 수 없으니 무턱대고 촬영할 수 없다. 여분의 필름을 몇 롤 준비했다고 해도 새 필름으로 갈아 끼우는 사이에 중요한 순간을 놓칠 수 있으니 신중할 수밖에… 필름이 주는 불편함이 신중함을 낳은 셈이다.필름이라면 아끼고 아껴서 중요한 순간을 포착하겠지만 디지털 카메라로는 마냥 찍어댄다. 나중에 지우면 되기 때문에 그다지 신중을 기하지 않는다.”
이 문제의식은 지난번 읽었던 재독학자 한병철 교수의 인터뷰에서 본 ‘제프쿤스의 조각, lg스마트폰, 그리고 브라질리언 왁싱의 공통점’에서 시작된 것인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적인 것, 아날로그적인 것’ 또한 인류역사의 긴 시점에서 놓고 보면 한 시점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워크맨과 삐삐를 추억하는 세대 또한 그로부터 1000년전 조상들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다움’을 상실한 세대로 여겨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물론 글자가 처음 고안되었을 때나 인쇄술이 발명 되었을 때도 이러한 반발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와는 비교할수 없이 빠른 발전의 시대에 살고있음이 분명하다) 발전으로 인해 우리가 잃는 것들에 대한 고민을 결국 ‘인간답다는 것’의 본질은 무엇인가의 고민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사라지는 경험들을 뒤돌아 보는 것이 단순 옛것에 대한 추억팔이인지 혹은 인간됨에 있어 필수적인 것들을 지켜내려는 노력인지에는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디지털 제품을 만드는 디자이너와 기획자들이 사명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편리성과 속도를 극대화시키려는 와중에 맥락이 사라지고, 다소의 불편함이 주는 깊이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선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human-centred design은 과연 정말 인간을 위한 디자인이라고 할수 있는 것인가? ‘현인류는 역사상 유래 없는 기술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더 풍족하게 만들겠다고 출현한 많은 것들이 결국 만든 사람 본인이 재밌어서 일종의 ‘개인적 모험’을 추구한 것의 결과이며, ‘행복의 추구’라는 궁극적 목표에는 별 기여한 바가 없다는 것.

 

2. 또 한가지 흥미로워던 부분은 일상속 사물에 숨어있는 정치성에 대한 언급.
“(t머니에 대해) 사운드와 이미지보다 더 중요한 점은 교통카드를 찍는 행위의 디자인이다. 예컨대 버스를 타는 과정만 떠올려보더라도 이 행위가 몹시 압축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버스 요금을 내는 절차가 교통카드를 찍는 행위로 압축된 것이다 … 이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사람이 사라진 지 오래고 거스름돈으로 옥신각신할 일도 없어졌다 …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절차가 축약되면서 지불 감각도 둔해진 것 같다. 말하자면 번거로움이 사라지는 대신 돈이 빠져나가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티머니가 직불 카드 기능까지 갖추고 있어서 지금의 청소년들은 어른들보다 일찌감치 이러한 경험을 하고 있다. 간편한 지불에 익숙해지는 한편 과정의 경험이 하나씩 삭제된다 … 소비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절차와 연계된 감각이 사라진다는 것도 짚어봐야 할 점인데 그중에는 우리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권리도 포함되어 있다”
‘이케아의 flatpacking은 단순함과 효율성의 미학을 창조했다. 갖가지 방식의 자투리 없애기는 기본적으로 합리적인 관리 원칙을 따른다 .. 합리성이 생산에 투입되는 비용을 낮추기 위한 방편이라는 점은 확실하며, 그 과정에서 가격이 저렴하다는 매력이 두드러지면서 사용자들의 만족감을 높이는 것이다 … 하지만 자투리를 없애는 것에서 시작된 효율성 높은 제품이 자리를 굳히는 사이에 수준 높은 제품을 만날 기회가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있음을 느낀다 … 또한 사무실에 놓이는 사물과 가정에 놓이는 사물에 차이가 거의 없어졌다 … 온갖 종류의 물건이 쏟아지는 오늘날 겉으로는 다양성이 확보된 것 같지만, 사실은 20세기 초에 형성된 표준화의 미덕이 꾸준히 일상 공간을 지배해왔고 사람들은 그 규칙에 익숙해져 있다. 이케아 매장 곳곳에서 이케아 제품으로 꾸며놓은 방은 이러한 표준화를 보여주는 한 풍경이다. 공간의 맥락이 무의미해진 동일화, 즉 공간의 생산라인에서 시작된 치수의 규칙이 아주 사적인 곳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아는만큼 보인다. 집에 굴러다니는 사물에서도 사회와 정치와 철학을 뽑아내는 매의 눈이 부럽다. 그러기 위해선 물론 아는게 많아야겠지만 그에 더해서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익숙함을 낯설게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건 (적어도 내 수준에선) 사색을 요구하는, 상당히 고차원적인 정신의 활동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이런 작업 또한 위에서 말한 ‘사라져가는 경험’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박성현 –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中

 

전체주의자는 ‘사회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개인주의자는 ‘인간은 세상과 영원한 긴장관계에 놓인 존재다’라고 믿는 사람이다. 전체주의자는 인간을 구원하는 사회를 만드는 일을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개인주의자는 훌륭한 자아, 훌륭한 개인이 되는 것을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전체주의자는 인간을 구원한다는 사회에 관한 이미지를 바꾸는 순간, 전체주의 사상A에서 또 다른 전체주의 사상b로 간편하게 옮겨갈 수 있다. 개인주의자는 ‘개인으로서 사는 것’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한 여전히 개인주의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p.6)

개인이라는 존재는 저절로, 자연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개인은 예외였다. 사람은 오랫동안 떼로 살아왔다. 그래서 우리 유전자 속에는 떼의 본능이 매우 강력하게 똬리 틀고 있다. 훌륭한 떼는 자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훌륭한 자아는 나 자신의 선택과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p.24)

‘자아의 중첩 구조’에 대하여 키에르케고르는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에게 관계시키는 관계’라고 벌렀다. 좀 과장에서 말하면 키에르케고르 사상의 핵심은 이 말 속에 다 들어 있다. 자아는 세상에 대해 ‘긴장 관계를 구성하는 한쪽 극’이기도 하고, 그 긴장관계 자체이기도 하며, 그 긴장관계를 끊임없이 중첩 구조, 복합 구조로 확대해가는 녀석이기도 하다. (p.58)

인간을 구원하는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은 ‘감히 세상 따위가 구원해 낼 수 있는’ 싸구려 존재가 아니다. (p.78)

자유와 권리를 누릴 때가 아니라,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세상과 긴장을 빚을 때 개인, 즉 자아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참된 개인주의의 궁극적 목표는 ‘자유와 권리’가 아니라 ‘진실과 자아’이다. (p.114)

윤리, 도덕 기준,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은 개인의 영혼 밑바닥에서부터-세상과 자아 사이의 긴장에서부터-나와야 한다. 이 긴장이 사라지면 세상이 원하는 것이 선이고, 세상이 미워하는 것이 악이 될 뿐이다. (p.146)

전체주의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아의 죽음-세상과 자아 사이에 긴장이 증발하는 현상-이다. 자아의 죽음이 곧 전체주의를 만들어내는 자중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말하는 선과 악을 의심하는 것-설사 부도덕하다라는 비난을 받더라도 자기 자신의 가치 기준을 세우는 것-이것이 바로 자아의 징표다. (p.147)

자아는 세상과 긴장관계에 놓은 대립물이기도 하고, 이 긴장관계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긴장을 끊임없이 강화하는 것으로 치자면 진실만큼 훌륭한 것이 없다. 진실은 불편하고, 뼈아프고, 거추장스럽기 때문이다. (p.155)

진실이 버거운 까닭은, 진실을 직시하는 순간, 세상-자아 사이의 긴장이 더욱더 강력한 상태로 불거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까닭에 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일 때 자아는 한 단계 성장하게 된다.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관점과 입장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p.156)

‘과거’의 한계, ‘과거’의 구질구질함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것-이것이 바로 과거와 현재 사이의 건강한 긴장이다. (p.211)

‘시간에 관한 예술’은 곧 삶과 생명에 대한 사랑이다. 모든 현재는 곧바로 과거가 된다. 엄격히 말하면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뒤로 무한히 흘러간 과거와, 앞에서 무한히 밀려드는 미래가 우연히 마주친 게이트웨이가 ‘현재’라 불릴 뿐이다. 삶을 사랑하고 긍정한다는 것은 과거를 이해하는 일이다. (p.213)

사실에 대한 관찰에서 출발한, 성실하고 꾸준하고 정직한 진실 추구 과정이 곧 진실이다. 그래서 진실은 요란하지 않다. 무엇인가 사람들이 모여서 고함지르고 시비를 따지며 왁자지껄 소동을 부리는 곳에는 거의 진실이 없다고 생각하면 일단 안전하다. (p.274)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함부로 양심,도덕,정의,진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삶은 진실은 복합적이고 다면적이기 때문이다. (p.291)

모든것의 연결이 다양성의 후퇴로 이어지고 있는 세상.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단순 설명을 넘어 더욱 절실한건 사람들로 하여금 ‘멈춰 돌아보게 만들’ 본질의 힘과 신선한 관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근데 새로운 관점으로 보고 다른 목소리를 내려면 역설적으로 덜 보고 덜 듣는 법을 배워야 하는게 아닐까, 왠지 그런 뭔가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가 계속 내 안에 있다. 더 많이 머리 속에 집어 넣길 강요하는 정보의 소음 속에서 고집스레 나만의 속도를 유지하며 책 한권으로도 사골을 우려내면서 자족할 수 있는, 그런 바보같은 우직함이 갈수록 희귀해진다. 침묵이나 묵상 같은 구시대의 가치들이 더욱 빛을 발하게 되지 않을까. 깊이를 향하기가 차암 어려운 세상이다.

꼰대성에 대해

내가 즐겨 찾는 ‘다윗의 서재’에서 발췌.

http://blog.naver.com/gilsamo

 

“‘동방예의지국’은 대한민국의 빛나는 닉네임이다. 어른을 공경하는 건 좋은 전통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미덕이다. 장유유서의 민족적 전통은 어른스럽지 못한 막무가내 식의 꼰대기질까지 아우르는 건 아니다. 젊은이가 어른을 공경해야 하는 당위와 별개로 어른은 젊은이들에게 공경 받을만한 덕과 인품을 갖춰야 한다. 두 입장은 서로 양립하면서 서로를 삼투압으로 피드백해야 한다. 이것이 결락된 어른철학은 교조화된 권력에 빠져 결국 우리 사회를 시끄럽고 추하게 만든다. 생물학적 나이가 어른의 크기를 규정하지 않는다. 어른의 본질은 외재적 숫자가 아닌 내재적 품격에서 발현된다.”

 

“나이가 권력이 된 것은 경험의 두께를 맹신했기 때문이다. ‘내가 오래 살았기 때문에’ 혹은 ‘내가 경험해봐서 아는데’라는 권력화된 감각의 축적률이 모든 진리 인식의 최상단에 놓인다. 그렇기에 경험의 물리력을 수단으로 젊은이를 훈계하고 가르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자기의 경험’으로서 타자마다의 고유한 상황배경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모순을 가진다. 더욱이 경험은 외재적 상황과는 또 다른 개인의 인지.수용.해석 능력의 편차에 따라 각기 다른 밀도로 수렴된다. 나이라는 일차원적 물량만으로는 논증하기 어려운 복잡다단한 부피와 질량의 함수관계를 관통한다는 얘기다.”

 

“나이가 많다는 것에 대한 함정은 철학사적으로 영국의 경험론자들이 가졌던 불편한 오해와 맥을 같이 한다.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을 비판하며 경험에 의한 귀납적 도출을 역설했다. 그러나 베이컨의 경험론은 데카르트에 의해 공박당했다 … 감각과 경험을 중시하는 경험론과 사유와 이성을 절대시한 합리론은 서양철학의 두 뿌리다. 이후 칸트에 의해 두개의 사조가 통합되어 새로운 인식론의 지평을 열기까지 감각(경험)인가 사유(이성)인가의 논쟁은 서양철학사의 뜨거운 토론주제였다… 칸트는 그의 인식론에서 경험을 재료(내용)로 삼되 경험과는 상관없이 타고난 인식능력(형식)을 통해 보편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경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사유는 내용이 없어 공허하고 지성의 능동적 활동에 따른 개념이 없는 경험은 틀과 형식이 없어 맹목적이라는 것이다.”

 

“나이듦에 대한 고매한 통찰은 헤밍웨이를 노벨상으로 이끈 ‘노인과 바다’의 웅숭깊은 주제와도 닿아 있다. 많은 사람이 이 소설의 포인트를 한 노인(인간)의 불굴의 의지와 투혼으로 잡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일면적 감상은 헤밍웨이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 뿐이다. 주인공 산티아고의 진정한 위대함은 물고기와의 죽음을 건 혈투가 끝난 후 별일 없다는듯이 집에 가서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여유있게 커피를 마시는 데 있다. 강렬하고 지독한 삶의 순간순간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 할 수 있는 힘. 그것이 노인 산티아고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결국 정신과 영혼의 고결한 크기야말로 나이듦의 본질이며 숭고한 생명력이다.”

 

“물론 경험은 중요하다. 하지만 경험 못지 않게 사유와 이성도 중요하다. 그리고 겸양과 절제는 나이듦의 궁극이다. 감각에 대한 맹신으로 야기된 교조화된 경험론은 책 한권 읽고 세상을 재단하려는 교만과 동일한 성질의 오류다 … 비트켄슈타인의 말처럼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것이 세상의 진리를 설파하는 보편적 잣대가 되기에는 한없이 작고 미처하다. 나이듦이란 본질적으로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얼마전 교회의 한 청년(나보다 13살이 어린)에게 ‘형이 너보다 조금 더 살았으니까 해주는 말인데’ 하면서 면박을 줬다가 속칭 ‘꼰대’가 된 것 같아 얼굴이 화끈해진 경험을 했다. 장난으로 대충 넘어가는 분위기였지만 몇일 후 그 청년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독일까지 왔고 사실 격려가 많이 필요한 섬세한 친구란 걸 알고 어찌나 스스로가 하찮고 후회가 되던지. 짧은 경험 안에서도 그것을 자신만의 고유한 성찰을 통해 멋스런 통찰력으로 바꾸어내고 또 그걸 살아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오랜기간 축적된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유의 틀로 정제시키지 않았거나 혹은 타성에 젖어 있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꼰대가 되는건 정말 한순간이다. 강자 앞에선 숙이고 약자 앞에선 강한, 비겁하고 과시하길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 두렵다.

나이가 조금 들고나니
잘 모르는 것 앞에선 침묵할 수 있는게 참 용기고 멋인 것 같다. 그리고 참 달변가는 적게 말하되 많이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것. 깊이 사유하고 삶으로 체화시키지 않았다면 입을 다무는게 일단 유익한 것 같다. 설령 살아낸 경험이라 해도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한마디인지 스스로 정직할 필요가 있다. 꼰대가 되는건 한순간, 나이는 상관없다. 상대적 약자 앞에서 나를 증명하려는 비겁함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에 그렇다.

쓰여지는 삶

 

사유하는 것을 하나의 지적 유희로 여겨 이런저런 주제에 대해 ‘글을 쓰는’ 것과 내 삶을 글로 풀어내려다 보니 그저 ‘글이 써지는’것엔 정말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쓰는 글은 생각을 정리시켜주고 어쩌면 누군가에게 유익한 정보, 감동을 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단지 내가 필력이 없어 그런 걸 지도)

쓰이는 글은, 아프다. 나를 마주해야 해서 그렇다. 그래서 술술 써나 갈 수가 없다. 한 줄 쓰고,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한걸음 내딛는 식이다.

물론, 글은 정제된 수정의 예술이다. 반면 삶엔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
글을 쓰는 것이 나의 삶을 나누는 일이라고 아무리 예찬해봐도 결국 최고의 명문은 삶 자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정제된 글엔 거리낌이 없지만 삶을 정말 아름답게 하는 것은 과정 속의 어리숙함과 부대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글로도 온전히 담아낼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부단히 애는 써볼 수 있다. 생동력 있는 문장 안에 삶을 조금이라도 담아낼 수 있단 건 정말 큰 재주다. 내가 일생을 들여 소망하는 그런 재주!

간격에서 자유하기

 

Quantifiend Self 관련 툴들을 좀 사용해봤는데 별 도움도 안되고 거부감만 생겨서.. 내가 업무 외 시간중 꼭 시간을 투자했으면 하는 일들을 요일별로 나누고 각 아이템에 점수를 붙였다. 1주일동안 모든 활동을 충실히 이행하면 100점.

근데 이번주를 합산해보니 27점이다.
27점. 이 F나 먹고 떨어질 놈아. 그렇게 환청이 증폭되면서 참을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많은 친구들이 나를 착실히 자기 할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 알고있다. 페이스북과 대외활동을 통해 열심히 사기를 치며 그런 이미지를 투영시킨 시간들의 성과다. 근데 그나마 의식적으로 살아낸게 27점이면 그간 지내온 내 삶은 과연 몇점이었을까. 자, 이제 나를 평범한 인간상의 샘플이라고 가정하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생을 점수로 매겼을때 이정도 점수가 나올것이라 예상해본다. 먹고 살기 위해 꼭 해야하는 회사 일이나 내가 책임을 지고 있는 그런 일들이 아니라면, 이번달 책을 몇권 읽겠다던지 혹은 독학으로 코딩을, 악기를, 언어를 배워보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점수로 환산했다면 말이다.

Screen Shot 2016-02-12 at 11.02.47
…운동은 안빠지고 한다. 아쉽게도 뇌용량은 벌크업이 안된다.

(위 사진 캡션에 덧붙여: 아마도 행동으로 옮기면 바로 결과가 보이는 웨이트트레이닝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그건 다르게 말하면, 글을 읽고 배우고 내적성장을 이루는 과정 또한 직관적으로 점검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내 경우는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이게 자주 가능하다.)

삶은 얘기치 못한 모습으로 불쑥불쑥 찾아온다. 타인의 모습으로, 혹은 감당할수 없는 시련으로. 연약한 우리의 의지는 불능의 상태로 몇일을 혹은 몇달을 보내다가 또 담금질을 거치고.. 강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래봐야 27점에서 좀 나아지는 수준일거다. 그래봐야 F다. 이 낙제나 쌈싸먹고 떨어질 패배자놈아. 근데 사실 너는 이것보다 더 잘할수 있고 잘해야한다고. 너의 잠재력을 썩히지 말라. 노력하는 자에게 불가능은 없다고 우리는 배웠다.

그래서 나는 이상적인 나와 현실 사이 간격에서 늘 살아왔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에겐 높은게 또 하나 있다. 읽진 않고 사기만하는 책들의 더미가 그것이다. 내게 있어 책장이야 말로 그 간격 자체이다. 부끄러운 내 지적 허영심. 남들에겐 감추고픈, 가끔 책장을 쭉 흝어보며 느끼는 스스로 속이는 자의 헛된 배부름. 자기연민과 자기혐오를 동시에 느끼는 아이러니!

코딩을 끝내고 미디움에 글을 하나 쓰고 개인적인 리서치 하나를 끝냈어야 할 이번주말 나는 다른 일들을 했다. 예상치 못하게 시작한 일이 다른 만남을 부르고, 날씨가 여의치 않아 뒤로 미루고, 식사를 포기할 만큼 절박하진 않아 또 미루고, 그러다보니 27점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예상치 못한 만남으로 새로운 일을 도모하게 되었고, 기회가 생겼고, 많이 웃었다. 점수로 환산되진 않을, 시간지나고 보면 감사한지도 모를 그런 보너스 같은 시간들이다. 부질없지만 여기서 얻을 유틸리티를 굳이 합산하면 낙제는 간신히 면할지도 모르겠다. 근데 또 낙제면 어떠냐, 허약한 내 자아에게 넌 다 할수 있다고 사기치는 세상을향해 ‘그래 뭐 내가 이정도지.’ 말할 수 있는 것도 용기고 새로운 관점이다. 자족함과 현실에 안주함 사이의 경계는 참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이젠 계획대로 안되는게 生이라고, 내가 얘기치 않은 방향으로 채워지고 풍성해질수 있단 가능성을 열어두려한다. 간격에서 벗어나면 더 즐길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즐길수 있다면, 내년은 30점, 내 후년은 뭐 35점, 혹시 아나, 낙제는 면할 수 있을지도. 죽을 날 다가왔는데 여전히 낙제인생이 그렇게도 한스럽다면 그간 적립한 보너스 포인트 클레임 안되냐고 생때라도 한번 부려봐야지. 난 많이 보고, 많이 읽고, 진심으로 사람들을 대하려 노력하고, 매순간 생각하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말할수 있다면 그걸로 된게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