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여지는 삶

 

사유하는 것을 하나의 지적 유희로 여겨 이런저런 주제에 대해 ‘글을 쓰는’ 것과 내 삶을 글로 풀어내려다 보니 그저 ‘글이 써지는’것엔 정말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쓰는 글은 생각을 정리시켜주고 어쩌면 누군가에게 유익한 정보, 감동을 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단지 내가 필력이 없어 그런 걸 지도)

쓰이는 글은, 아프다. 나를 마주해야 해서 그렇다. 그래서 술술 써나 갈 수가 없다. 한 줄 쓰고,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한걸음 내딛는 식이다.

물론, 글은 정제된 수정의 예술이다. 반면 삶엔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
글을 쓰는 것이 나의 삶을 나누는 일이라고 아무리 예찬해봐도 결국 최고의 명문은 삶 자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정제된 글엔 거리낌이 없지만 삶을 정말 아름답게 하는 것은 과정 속의 어리숙함과 부대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글로도 온전히 담아낼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부단히 애는 써볼 수 있다. 생동력 있는 문장 안에 삶을 조금이라도 담아낼 수 있단 건 정말 큰 재주다. 내가 일생을 들여 소망하는 그런 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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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격에서 자유하기

 

Quantifiend Self 관련 툴들을 좀 사용해봤는데 별 도움도 안되고 거부감만 생겨서.. 내가 업무 외 시간중 꼭 시간을 투자했으면 하는 일들을 요일별로 나누고 각 아이템에 점수를 붙였다. 1주일동안 모든 활동을 충실히 이행하면 100점.

근데 이번주를 합산해보니 27점이다.
27점. 이 F나 먹고 떨어질 놈아. 그렇게 환청이 증폭되면서 참을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많은 친구들이 나를 착실히 자기 할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 알고있다. 페이스북과 대외활동을 통해 열심히 사기를 치며 그런 이미지를 투영시킨 시간들의 성과다. 근데 그나마 의식적으로 살아낸게 27점이면 그간 지내온 내 삶은 과연 몇점이었을까. 자, 이제 나를 평범한 인간상의 샘플이라고 가정하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생을 점수로 매겼을때 이정도 점수가 나올것이라 예상해본다. 먹고 살기 위해 꼭 해야하는 회사 일이나 내가 책임을 지고 있는 그런 일들이 아니라면, 이번달 책을 몇권 읽겠다던지 혹은 독학으로 코딩을, 악기를, 언어를 배워보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점수로 환산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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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은 안빠지고 한다. 아쉽게도 뇌용량은 벌크업이 안된다.

(위 사진 캡션에 덧붙여: 아마도 행동으로 옮기면 바로 결과가 보이는 웨이트트레이닝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그건 다르게 말하면, 글을 읽고 배우고 내적성장을 이루는 과정 또한 직관적으로 점검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내 경우는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이게 자주 가능하다.)

삶은 얘기치 못한 모습으로 불쑥불쑥 찾아온다. 타인의 모습으로, 혹은 감당할수 없는 시련으로. 연약한 우리의 의지는 불능의 상태로 몇일을 혹은 몇달을 보내다가 또 담금질을 거치고.. 강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래봐야 27점에서 좀 나아지는 수준일거다. 그래봐야 F다. 이 낙제나 쌈싸먹고 떨어질 패배자놈아. 근데 사실 너는 이것보다 더 잘할수 있고 잘해야한다고. 너의 잠재력을 썩히지 말라. 노력하는 자에게 불가능은 없다고 우리는 배웠다.

그래서 나는 이상적인 나와 현실 사이 간격에서 늘 살아왔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에겐 높은게 또 하나 있다. 읽진 않고 사기만하는 책들의 더미가 그것이다. 내게 있어 책장이야 말로 그 간격 자체이다. 부끄러운 내 지적 허영심. 남들에겐 감추고픈, 가끔 책장을 쭉 흝어보며 느끼는 스스로 속이는 자의 헛된 배부름. 자기연민과 자기혐오를 동시에 느끼는 아이러니!

코딩을 끝내고 미디움에 글을 하나 쓰고 개인적인 리서치 하나를 끝냈어야 할 이번주말 나는 다른 일들을 했다. 예상치 못하게 시작한 일이 다른 만남을 부르고, 날씨가 여의치 않아 뒤로 미루고, 식사를 포기할 만큼 절박하진 않아 또 미루고, 그러다보니 27점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예상치 못한 만남으로 새로운 일을 도모하게 되었고, 기회가 생겼고, 많이 웃었다. 점수로 환산되진 않을, 시간지나고 보면 감사한지도 모를 그런 보너스 같은 시간들이다. 부질없지만 여기서 얻을 유틸리티를 굳이 합산하면 낙제는 간신히 면할지도 모르겠다. 근데 또 낙제면 어떠냐, 허약한 내 자아에게 넌 다 할수 있다고 사기치는 세상을향해 ‘그래 뭐 내가 이정도지.’ 말할 수 있는 것도 용기고 새로운 관점이다. 자족함과 현실에 안주함 사이의 경계는 참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이젠 계획대로 안되는게 生이라고, 내가 얘기치 않은 방향으로 채워지고 풍성해질수 있단 가능성을 열어두려한다. 간격에서 벗어나면 더 즐길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즐길수 있다면, 내년은 30점, 내 후년은 뭐 35점, 혹시 아나, 낙제는 면할 수 있을지도. 죽을 날 다가왔는데 여전히 낙제인생이 그렇게도 한스럽다면 그간 적립한 보너스 포인트 클레임 안되냐고 생때라도 한번 부려봐야지. 난 많이 보고, 많이 읽고, 진심으로 사람들을 대하려 노력하고, 매순간 생각하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말할수 있다면 그걸로 된게 아닐까 한다.

관용어구라는 말

 

관용어구(idiom)란게 참 흥미로운 단어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가 쓰는 거의 모든 단어와 표현에 있어서 우리는 그 단어의 뿌리/기원등을 알지 못하고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아이고 내가 너때문에 못살아!’ 라던지 (정말 삶의 의지를 잃었단 의미로 저 표현을 쓰는 사람은 없다) 그 외에도 넓게보면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기 위해 조합중인 모든 단어가 이 범주에 들어간다. 즉, 어쩌면 일상의 언어 자체가 관용어구들의 집합이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관용어구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이러니인 샘이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이해된/내재된 어떤 개념을 언어란 틀을 사용해서 표현한다. 단어를 말로 뱉어 낸 순간 그 본래의 온전했던 의미는 일부 상실된다. 내 마음을 오롯히 담아낼 수 있는 완벽한 언어는 없을거다. 사랑의 마음을 언어로 표현할때 느끼는 답답함이 적절한 예시중 하나 일것이다.

관용어구와 다를 바 없는 단어들의 조합이 불완전한 또 하나의 이유는 언어는 언제나 -심지어 같은 언어를 사용할지라도- 특정 문화내의 구조적 영향하에 있기 때문에 각사람마다 같은 단어 같은 표현을 이해함에 있어 미세한 차이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거이다. 하물며 다른 언어를 사용하거나 다른 문화권에서 오래 거주한 경험을 가진 두 사람이라면..?

그렇기에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고 마음이 전해진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이렇듯 불완전한 언어를 재료로 사용하여 글을 쓰는 것에 있어 최고의 예술적 경지가 있다. 비유라던지, 언어의 파괴라던지, 시같은 것들이 여기에 들어간다. (문학적/문화적 affordance에 의존하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표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클리셰를 배제하려 애쓴 그런 글들이 가끔 있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예술적 실험 혹은 자기만족을 위한 유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가 다른 인간에게 이해되고, 감동을 주고, 새로운 생각의 지평을 열어준다면 이는 더더욱 위대한 일이다. 그리고 내 경험상, 많은 경우 작가조차 의도하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이런 기적이 일어난다. 글이 삶과 부딪칠때 일어나는 놀라운 화학반응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딪치지 않고 편하게 읽히는 글은 그 가치가 적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제만날지 모르는 글과의 부딪침에 언제나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어느 독서 구입 애호가의 생존전략

 

책을 사서 10%밖에 못 읽을 나라면 책을 10권사자

그럼 한권은 읽을거다

대신 10권 값을 투자 할 책 한권을 고르면 된다(10권을 모두 10%씩만 읽을수 있단건 함정)

그런데 양서 한권을 고르는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추천을 받거나 미디어의 호평을 받아 산 책에 실망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이럴땐 과감하게 집어 던지는게 유익하다
흔히 우리는 책을 쓰는 행위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있어서 책을 쓴 사람이면 당연히 똑똑한 사람이라고 짐작할 때가 많은데 그건 사실이 아닐뿐더러 비판적 독서를 가로막는 허들이 될수 있다. 내게 있어 이건 충격적인 발견이었다. 어떤 저자들은 집에서 놀고 먹는 나와 당신보다 멍청하다. 혹은 굉장히 똑똑하지만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는 책도 있다
결론적으로. 책을 많이 사자. 10권사면 1권은 건진다…

새벽 버스 안에서

설레임이 짜증으로 바뀌는 것도 한순간.
뒤에 있는 남자는 버스 출발하자마자 미친듯이 코를 골기 시작했고
옆에 여자는 랩톱을 꺼내어 드라마를 보고 있다.
낯선 이와 나 사이에 암묵적으로 침범하지 말아야 할 거리/반경이 사람마다 다르단걸 느낀다. 가령 팔꿈치가 살짝만 닿아도 흠칫하는 나에 반해 옆좌석의 여자는 마치 내가 옆에 없단 듯이 행동한다.
무더운 여름 감옥에선 다른 수감자들이 또다른 36.5도 짜리 열덩이로 밖에 느껴지질 않아서 슬프다고, 그래서 겨울이 더 좋다고 한 신영복 선생님 글이 문득 생각났다
모두 프랑크푸르트로 향한다는 것 외에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굳이 알 필요도 없는 사람들. 오늘 처음 만나 적어도 내 관점에선 내게 여러모로 민폐를 끼치고 있는 중인 이 사람들을 더불어 사는 세상이란 이유로 어디까지 이해해야 하는 걸까. 
나 빼고 다 잘 자고 있는 것 같다.
주말 여행, 시간 좀 아껴보겠다고 굳이 탄 새벽버스 안에서. a.m 1:50

갈수록

갈수록 픽션이 안읽혀지고 시간낭비처럼 느껴지는건 큰 문제다. (잘 만들어진 영화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상은 떠먹여준다. 수동적으로 느끼고 체험하면 된다. 반면 훨씬 깊고 긴 호흡의 서사를 전달하는 소설에선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능동적으로 텍스트를 해석하고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할 부지런함이 없어서다

고독

이제는 우리를 외로운 채로 내버려두어야 한다. 친구를 만나고 싶은 마음 그대로 놔두기도 해야 한다. 친구가 내 앞에 있을 때보다 없을 때 더 잘 보이기 때문이다. 타인과 함께 있을 때보다 외로울 때 나를 더 잘 볼수 있고, 나와 대화할 수 있고, 나와 화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집착하지 않으면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고독의 방 하나를 얻게 될 것이다.

<묵상의 여정> p.277